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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29 - 예수는 왜 로마의 앞잡이를 제자로 삼았을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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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의 서편으로 갔다. 그곳에는 티베리아스가 있다. 갈릴리에서 가장 큰 번화가다. 호텔과 리조트 건물들이 들어서 있고, 레스토랑과 이런저런 부대 시설들도 많았다. 순례객들이 숙소를 잡는 곳도 주로 티베리아스 지역이다. 호숫가를 산책하다가 흥미로운 장소를 만났다. 높다란 호텔 뒤에 있는 조그만 공원이었다. 공원 한구석에 오래된 유적이 하나 있었다. 묘지였다. 가까이 갔다. 바닥에는 돌로 만든 관(棺)도 보였다. 주위에는 먹다 버린 맥주캔 등이 널려 있었다. 밤에 이스라엘 청년들이 와서 맥주를 마시기도 하는, 약간 으슥하기도 한 장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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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2세기에 유대인들이 사용했던 묘지. 갈릴리 호수의 서편인 티베리아스에 있다.

안내 푯말이 눈길을 끌었다. 기원전 2세기경 갈릴리의 유대인들이 사용한 무덤이었다. 당시 유대인들은 동굴을 무덤으로 썼다. 이스라엘 지역은 덥고 기온이 높다. 그래서 시신도 빨리 부패한다. 한국처럼 삼일장을 치를 수도 없었다. 사망자가 발생하면 곧장 장례를 치르고 동굴 무덤의 입구는 돌로 막았다. 시신이 부패하면서 발생하는 악취가 동굴 밖으로 나오는 것을 막기 위해서였다. 예수의 십자가 죽음 때도 그랬다. 골고다 언덕의 동굴이 무덤으로 사용됐다. 성경에는 예수의 주검이 ‘바위를 깎아 만든 무덤’에 안치됐고, ‘무덤 입구의 큰 돌을 굴려 막아 놓았다’(누가복음 15장46절)고 기록돼 있다.

갈릴리의 무덤도 마찬가지였다. 무덤의 입구를 막는 돌은 두 종류였다. 하나는 나무로 된 문처럼 만든 돌문이었다. 돌을 가공해야 하니까 아마도 형편이 넉넉한 사람들이 사용하지 않았을까. 또 하나는 굴릴 수 있는 둥그런 바위였다. 예수의 무덤은 사람들이 바위를 굴려서 입구를 막았다. 묘지 주위의 공원을 거닐었다. 무덤은 우리에게 ‘시간’을 일깨운다. 이미 흘러간 저들의 시간처럼, 우리의 시간도 얼마 남지 않음을 침묵으로 일깨운다. 바닥에는 옛날에 썼던 관(棺)이 놓여 있었다. 사막 기후라 나무가 귀해서 그랬을까. 이스라엘에서는 돌로 만든 석관(石棺)을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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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가 귀한 이스라엘에서는 석관을 주로 사용했다. 관을 덮는 두껑도 돌로 돼 있다.

나는 숙소로 돌아와 유대인 출신의 기독교 신학자였던 알프레드 에더스하임(1825~1889)이 쓴 『유대인 스케치』를 읽다가 뜻밖의 대목을 발견했다. 티베리아스 도시는 헤롯왕이 건설했다. 로마의 티베리아스 황제의 이름을 따 도시명을 지었다. 도시를 세울 때 티베리아스 주민들에게는 집과 땅과 세금혜택 등을 주었다. 그런데 정작 유대인들은 신도시 티베리아스를 탐탁치 않게 여겼다. 그 일대가 예부터 묘지였기 때문이다. 산책길에 어쩌다 마주친 묘지는 우연이 아니었다. 무덤을 파낸 곳에 도시가 세워지기 전에는 그 일대가 온통 묘지였다. 유대인들에게 묘지는 부정한 장소다. 거기에 집을 짓는 건 상상조차 할 수 없다. 게다가 율법을 어기는 행위였다. 유대인들에게 티베리아스는 한 마디로 ‘불경스러운 도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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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아스는 무덤을 파내고 세운 도시였다. 유대인들은 무덤을 부정한 장소로 여겼다. 티베리아스 건설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겼다.

2000년 전 유대인들은 ‘갈릴리 출신’을 무시했다. 플라비우스 요세푸스의 역사서에는 심지어 ‘이방의 갈릴리’라는 말까지 등장한다. 갈릴리의 북동부에 페니키아인과 시리아인, 아랍인, 그리스인 등 이방인들이 모여 살았기 때문이다. 신의 구원을 약속 받은 유일한 민족인 유대인들에게 이방인은 늘 경계의 대상이었다. 그들과 섞이는 것도, 그들의 문화와 섞이는 것도 싫어했다. 그러니 묘지 위에 세운 도시 티베리아스는 유대인의 갈릴리에 대한 반감을 더욱 키웠을 터이다.

예수의 고향 나사렛은 갈릴리에서 그리 멀지 않다. 갈릴리 권역이다. 예루살렘의 유대인들은 예수를 ‘갈릴리 출신’으로 여겼다. 거기에는 곱지 않은 시선이 깔려 있었다. 정작 예수는 달랐다. 당시 유대인들이 목숨처럼 여기던 갖가지 잣대를 수시로 허물었다. 가령 세리(세금징수원)였던 마태를 제자로 삼는 대목도 유대인들에게는 상식 밖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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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산데르스 반 헤메센의 1536년 작 ‘세리 마태를 부르는 예수’. 오른편에 선 예수가 왼편에 앉은 마태를 부르고 있다.

예수는 길을 가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마태를 보았다. 예수는 그를 향해 ”나를 따라라“(마태복음 9장9절)고 말했다. 성경에는 ‘그러자 마태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고 기록돼 있다. 어찌 보면 극적인 장면이다. 둘은 서로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나를 따라라“는 말에 마태는 선뜻 일어섰다. 무엇이 마태로 하여금 주저 없이 일어서게 했을까. 혹자는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예수의 초월적 힘이라고 설명한다. 그런 식으로만 풀면 그리스도교는 ‘물음이 없는 종교’가 되고 만다. 물음이 없는 종교에는 길도 없다. 물음을 던질 때 비로소 길이 생겨나기 때문이다.

나와 예수, 그 사이에는 늘 아득한 낭떠러지가 있다. 예수의 말씀은 물음표 투성이다. 매일같이 성경을 펼쳐도 온통 수수께끼다. 오죽하면 예수 생전의 제자들도 그 말을 알아듣지 못했을까. 고개를 갸우뚱할 때마다 낭떠러지가 생겨난다. 나와 예수, 그 사이에는 아득한 절벽이 생긴다. 낭떠러지 이쪽에 선 우리는 건너 쪽을 향해 예수의 이름만 부를 뿐이다. ”주님! 주님!“ 그렇게 목놓아 외칠 뿐이다.

그런데 예수는 달리 말했다. ”내가 너희 안에 거하듯, 너희가 내 안에 거하라.“ 거하려면 어찌해야 할까. 다가가야 한다. 뚜벅뚜벅 ‘예수 안’으로 들어가야 한다. 그러려면 낭떠러지를 건너야 한다. 그런데 다리도 없고 길도 없다. 어떡해야 할까. 무슨 수로 저 아찔한 허공에 길을 낼 수 있을까. 구름 다리를 놓을 수 있을까. 그 열쇠가 바로 ‘물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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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바조의 ‘성 마태오를 부르심’. 빛과 어둠의 대비가 인상적이다.

회사에서 일을 할 때도 똑같다. 공부를 할 때도, 연구를 할 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막다른 벽에 부딪힐 때가 있다. 절벽 앞에 설 때가 있다. 어떠한 해법도, 돌파구도 보이지 않을 때가 있다. 그때마다 사람들은 당황한다. 이리저리 허둥댄다. 그러다 낙담한다. 결국 포기한다. 왜 그럴까. ‘물음’을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물음은 답에서 나왔다. 물음의 고향은 답이다. 그러니 답이 보이지 않을 때는 물음을 잡으면 된다. ‘1+1=2’다. 그런데 ‘2’라는 답이 보이지 않는다. 그럴 때는 ‘1+1’이라는 물음을 잡아야 한다. 그 물음은 결국 ‘2’로 돌아간다. 그러니 내 안을 향해 깊이, 더 깊이 물음을 던지면 된다. 그렇게 던진 물음은 결국 고향으로 돌아간다. 답으로 돌아간다. 왜 그럴까. 내 안에 이미 답이 있기 때문이다. ‘신의 속성’이 있기 때문이다.

나와 예수, 그 사이의 낭떠러지를 건널 때도 그렇다. 짙은 안개 속에서 예수의 메시지를 풀 때도 그렇다. 우리는 물음을 던져야 한다. 나의 눈과 나의 관점을 허물며 물음을 던져야 한다. 내 안을 향해 깊이 물어야 한다. 그래야 물음이 길을 낸다. 그렇게 묻고, 또 묻다가 ”아하!“하는 탄성과 함께 길이 보인다. 그 길을 통해 우리는 낭떠러지를 건너간다. 예수를 향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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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인의 궁정에서 20년간 궁정화가로 활동했던 귀도 카나치(1601~1663)의 ‘성 마태오를 부르심’.

세관에 앉아 있던 마태도 그러지 않았을까. 그의 내면에는 똬리를 틀고서 오랫동안 도사리고 있던 물음이 있지 않았을까. 인간에 대한, 삶에 대한, 신과 구원에 대한 물음 말이다. 그런 해묵은 목마름이 있지 않았을까. 예수는 그걸 적셨을 터이다. 성경에는 ‘마태가 일어선 이유’가 나와 있지 않다. 그렇지만 마태에게는 분명 이유가 있었을 터이다. 티베리아스의 호숫가에서 나는 눈을 감았다. 우리도 누군가를 스승으로 삼고 좇을 때가 있다. 그게 언제일까. 스승이 내 안의 목마름을 적셔줄 때다. 그럴 때 우리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스승을 따라간다.

세관에 앉아 있다가 벌떡 일어나 예수를 따라나선 마태도 대단하다. 그런데 마태를 제자로 택한 예수는 더 대단하다. 당시 마태는 ‘세리(稅吏)’라고 불리던 세금징수원이었다. 유대인들에게는 혐오의 대상이었다. 식민지 시절, 로마 제국의 하수인 노릇을 하며 유대인의 피땀을 짜내던 이들이 세리였다. 로마의 세금은 징수업자가 마음대로 집행했다. 로마에 바치는 세금 외에도 자신의 주머니를 불리기 위해서였다.

경제적 수탈뿐만 아니었다. 유대인들은 하느님에게만 헌물을 바쳤다. 십계명에서는 우상숭배를 전적으로 금지한다. 하느님 외에는 누구에게도 헌물을 바쳐선 안 된다. 그런데 로마 제국은 황제에게 헌물을 바치라고 강요했다. 유대인들에게는 극심한 ‘종교적 모독’이었다. 바리새인들은 예수에게 ”황제에게 세금을 내는 것이 합당합니까, 합당하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올가미를 씌우기 위한 함정이었다. 세금을 내지 말라고 하면 ‘반(反)로마’가 되고, 세금을 내라고 하면 신성모독으로 ‘반(反)유대’가 되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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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리우스 황제의 얼굴이 새겨진 로마의 데나리온 동전.

그 의도를 꿰뚫은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어찌해서 나를 시험하느냐? 세금으로 내는 돈을 나에게 보여라.”(마태복음 22장18~19절) 그들은 데나리온 한 닢을 꺼냈다. 거기에는 황제의 얼굴이 새겨져 있었다. 예수가 “이 초상과 글자가 누구의 것이냐?”라고 묻자 그들은 “황제의 것입니다”라고 답했다. 그러자 예수는 이렇게 말했다. “황제(가이사)의 것은 황제(가이사)에게, 하느님의 것은 하느님께 돌려 드려라.”(마태복음 22장21절) 그야말로 ‘우문현답(愚問賢答)’이다.

예수가 활동하던 당시는 로마가 재정 위기를 겪을 때였다. 세금 징수는 강압적이었다. 유대인들이 로마에 내야 하는 세금은 많았다. 인두세(재산세와 소득세)와 토지세는 물론이고 곡식 생산량의 십분의 일, 과일과 포도는 생산량의 오분의 일을 바쳐야 했다. 세리에 의한 세금 징수 과정은 잔혹하고 포악했다. 그런 세리를 유대인들은 벌레처럼 여겼다. 유대계 신학자 알프레드 에더스하임은 “팔레스타인에서 세리들은 매춘부와 이방인, 노상강도, 살인자 등과 동일한 수준으로 여겨졌다. 심지어는 파문당한 자로 여겼다”고 말했다.

그런데도 예수는 세리를 제자로 맞았다. 유대인이라면 누구나 손가락질을 할만한 일이었다. 가령 일제 식민지 시대에 일본의 앞잡이 노릇을 하는 한국인을 제자로 삼으면 어찌 될까. 사람들은 그 스승을 향해서도 손가락질을 하지 않을까. 예수는 그런 상황에서 마태를 제자로 삼았다. 성경에는 이 일에 대한 유대인들의 반응이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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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핸드릭 테르 브뤼헨의 ‘성 마태를 부르심’.

예수는 마태의 집에서 식사를 했다. 성경에는 ‘많은 세리와 죄인도 예수님과 그분의 제자들과 자리를 함께하였다’(마가복음 2장15절)고 돼 있다. 그 광경을 본 바리새인 율법학자들은 발끈했다. 그들은 예수의 제자에게 물었다. ”저 사람은 어째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음식을 먹는 것이오?“(마가복음 2장16절) 이 말을 들은 예수는 이렇게 답을 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마가복음 2장17절)

나는 이 대목에서 ‘예수의 눈’을 읽는다. 바리새인들은 사람의 겉모습을 봤다. 저 사람은 어디 출신이고, 직업은 무엇이고, 신분은 어떠하며, 어떤 신앙을 가지고 있는가. 그걸 따졌다. 그래서 세리와는 식탁에 함께 앉지도 않았다. 예수는 달랐다. 그 모두를 무시했다. 율법주의 사회였던 2000년 전의 이스라엘에서 예수의 행동은 상당히 도발적이고 혁명적이었다. 무엇이 예수로 하여금 그걸 가능하게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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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산더 비다 작 ‘예수께서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식사를 하시다’.

예수의 대답에 답이 있다. “건강한 이들에게는 의사가 필요하지 않으나 병든 이들에게는 필요하다.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예수는 사람의 ‘겉모습’을 보지 않았다. 유대인들이 말조차 섞지 않던 사마리아 지역의 우물가에서도 여인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오히려 사마리아 여인이 깜짝 놀랄 정도였다. 예수의 파격은 어디서 나왔을까. 누구나 손가락질하는 세리를 어떻게 자신의 제자로 맞아들였을까. 나는 거기서 ‘예수의 눈’을 본다.

그 눈은 각별하다. 겉모습만 훑는 눈이 아니다. 내면을 관통하는 눈이다. 예수는 세금징수원 마태를 볼 때도 ‘마태’를 보지 않았다. 사마리아 여인을 볼 때도 ‘여인’을 보지 않았다. 그럼 무엇을 보았을까. 그들 안에 깃들어 있는 ‘신의 속성’을 보았다. 그래서 예수에게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바리새인이든, 세리든, 사마리아 사람이든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예수는 그들 속에 잠들어 있는 ‘신의 속성’을 일깨우고자 했을 뿐이다. 신이 인간을 창조할 때 불어넣었던 ‘하느님의 모상(Image of God)’ 말이다. 그러니 가능했다. 세리와 함께, 죄인들과 함께 식탁에 앉아서 저녁을 먹는 게 예수에게는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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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니발레 카라치 작 ‘우물가의 사마리아 여인’.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신앙의 변절자로 봤다.

예수는 ”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 I did not come to call the just, but sinners.)“고 말했다. ‘의인’은 영어로 ‘the just’이다. ‘just’에는 ‘딱 맞아떨어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무엇과 맞아떨어지는 걸까. 그렇다. ‘신의 속성’이다. ‘죄인’은 그리스어로 ‘hamartolos’이다. ‘어긋나다, 빗나가다(misser)’의 뜻이 담겨 있다. 무엇과 어긋나는 걸까. 마찬가지다. ‘신의 속성’과 어긋나는 거다. 그래서 예수는 ‘의인’이 아니라 ‘죄인’을 찾는다. 어긋난 것을 바로 잡기 위해서다. 그걸 위해 예수는 이 땅에 왔다.

예수의 눈은 깊다. 현상 속의 본질을 본다. 우리의 눈은 거꾸로다. 본질이 아니라 현상만 본다. 그래서 예수는 말한다. ”네 마음의 눈을 돌려라.“ 그게 ‘회개’라고 주로 번역하는 회심(回心)이다. 예수가 설한 ‘메타노이아’다. ‘메타’는 ‘옮김, 변화’를 뜻하고, ‘노이아’는 ‘생각하다, 이해하다, 알다’는 뜻이다. 그러니 ‘회심’은 생각을 돌리고, 이해를 바꾸고, 앎을 변화시키는 일이다. 다시 말해 ‘나의 눈’을 바꾸는 일이다. 예수가 마태를 향해 손을 내미는 성경 속의 장면을 나는 종종 묵상한다. 거기에는 ‘예수의 눈’이 있다. 그 눈이 우리에게 말한다.

나를 따라라.“

<다음주는 연재를 쉽니다. 30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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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페이스북 주소 : www.facebook.com/baiksungh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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