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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의 현문우답] 예수를 만나다 28 -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수천 명이 배불리 먹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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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릴리 호수의 북쪽으로 갔다. 호숫가에 교회가 하나 있었다. ‘오병이어(五餠二魚) 교회(The church of multiplication)’. ‘다섯 개의 빵(五餠)과 두 마리의 물고기(二魚)’라는 뜻이다. 교회 안으로 들어갔다. 정면에 제단이 하나 있었다. 바닥에는 오래된 모자이크 조각이 박혀 있었다. 두 마리의 물고기와 하나의 광주리. 다섯 개의 보리빵이 광주리 안에 담겨 있었다. 척 봐도 무척 오래된 모자이크였다. 이 모자이크는 1930년대 초에 발견됐다. 4세기 때 이곳에 지었다는 비잔틴 시대의 교회 유적이다. 그 유적 위에 1936년 지금의 오병이어 교회가 세워졌다. 끊임없이 순례객들이 찾아왔다. 그들은 교회 안에서 눈을 감고 ‘오병이어’를 묵상했다. 예수의 이적 중에서도 대표적인 이적 일화. 우리는 그것을 무엇으로 받아들여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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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교회 안에 있는 제단. 그 아래 바닥에 모자이크 조각이 보인다. 물고기 두 마리에 빵이 담긴 광주리다.

예수 당시 갈릴리의 언덕에는 7000명이 넘는 군중이 모였다. 어마어마한 인파였다. 성경에는 남자 장정만 5000명이었다고 기록돼 있다. 그러니 여성들과 아이들을 합하면 7000~8000명은 족히 넘었을 터이다. ‘오병이어 일화’는 마가ㆍ마태ㆍ누가ㆍ요한복음 등 4복음서에 모두 기록돼 있다. 그중에서도 요한복음의 서술이 가장 구체적이다. 때는 유월절이 가까운 무렵이었다. 요즘 달력으로 치면 4ㆍ5월쯤이었다. 예수는 배를 타고 갈릴리 호수 건너편으로 갔다. 군중은 마음이 급했을까. 사람들은 육로를 통해 호수를 빙 둘러서 그곳까지 따라왔다. 성경에는 그 이유가 기록돼 있다. ‘(예수께서) 병자들에게 일으켰던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라고 돼 있다.

호수를 건넌 예수는 산으로 올라갔다. 언덕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멀리서 엄청난 인파가 예수를 향해 오고 있었다. 그걸 본 예수는 제자인 필립보에게 물음을 던졌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요한복음 6장5절) 그냥 던진 평면적인 말이 아니었다. 요한복음에는 ‘이는 필립보를 시험해 보려고 하신 말씀이다’(요한복음 6장6절)고 돼 있다. 예수는 제자에게서 무엇인가 보려고 했다. 필립보는 저들을 다 먹이려면 200 데나리온어치 빵을 사더라도 충분히 않겠다고 답했다. 당시 노동자나 군인의 하루 품삯이 1데나리온이었다. 만약 1데나리온을 5만원으로 계산한다고 해도 1000만원이란 액수가 나온다. 그러니 군중에게 저녁 식사용 빵을 제공하려면 굉장한 액수의 돈이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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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 당시에 사용된 로마의 은화. 아우구스투스 황제의 얼굴을 담은 데나리온 은화다. 1데나리온은 로마 군인의 하루 복무비였다.

나는 오병이어 교회 안에서 눈을 감았다. 당시 예수는 어떤 심정이었을까. 왜 필립보에게 “빵을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는가”라고 물었을까. 그 말은 무슨 뜻일까. 단지 빵을 살 수 있는 가게의 위치를 물은 걸까. 예수는 광야에서 악마의 시험을 받은 적이 있다. 40일간 밤낮으로 단식한 상태였다. 그러니 얼마나 배가 고팠을까. 그 정도면 멀쩡한 돌도 빵으로 보일 만큼 허기가 지지 않았을까. 악마가 말했다. “이 돌들에게 빵이 되라고 해보시오.” 그 말을 듣고 예수는 이렇게 받아쳤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복음 4장5절)

사람은 밥을 먹어야 산다. 유대인에게는 그게 빵이다. 빵을 먹어야 육신의 생명이 산다. 그런데 예수는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고 했다. 육신의 생명이 전부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 그럴까. 우리에게는 육신도 있고, 마음(영혼)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의 생명도 못지 않게 중요하다. 그럼 마음은 무엇을 먹어야 살까. 예수는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입이 뭘까. 신의 속성이다. 성경의 말씀은 모두 ‘신의 속성’에서 나온다. 그래서 그 말씀 속에 ‘신의 속성’이 담겨 있다. 그래서 빵만으로 살 수가 없다. ‘신의 속성’을 먹어야 내 마음의 속성도 살아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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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세기 스페인 바로크 회화의 황금시대를 대표하는 화가 바르톨로메 에스테반 무리요(1617~1682) 작 ‘빵과 물고기의 기적’.

그때 곁에 있던 다른 제자가 예수에게 말했다. “여기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이 저렇게 많으니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 말을 들은 예수의 반응은 다소 뜻밖이었다. 사람들로 하여금 풀밭에 한 무리씩 어울려 앉게 했다. 50명씩, 100명씩 둥그렇게 앉았다. 그러자 예수는 빵과 물고기를 두 손에 들고 하늘을 향해 감사를 드렸다. 마태복음에는 ‘하늘을 우러러 찬미를 드리신 다음 빵을 떼어 제자들에게 주시니, 제자들이 그것을 군중에게 나누어 주었다.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14장19~20절)고 돼 있다. 다른 복음서들도 마찬가지다. 제자들이 빵을 나누어 주었고, 군중은 배불리 먹었다고 돼 있다.

이 대목이 ‘오병이어 일화’의 쟁점이다. ‘제자들은 빵을 나누어 주었다’와 ‘사람들은 모두 배불리 먹었다’는 곧장 이어지는 두 문장 사이에 아무런 설명이 없다. 가령 ‘제자들이 건넬 때 빵 하나가 순식간에 둘로 불어났다’거나 ‘빵을 아무리 건네고 건네도 양이 줄어들지 않아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거나 ‘믿기 힘든 일부 사람들은 손을 직접 빵 광주리 안에 넣어보기도 했다’는 식의 이적임을 확실히 드러내는 구체적인 상황이나 묘사가 없다. 그런 식으로 빵을 나누고 남은 양이 열두 광주리에 가득 찼다고만 돼 있다. 그래서 의견이 갈린다. 어떤 사람들은 “‘오병이어 일화’야말로 신의 아들임을 입증하는 예수님의 분명한 이적”이라고 말하고, 또 어떤 이들은 다른 해석을 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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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병이어 교회를 찾은 순례객들이 기도와 묵상을 하고 있다.

정진석 추기경이 은퇴하기 전이었다. 나는 집무실에서 ‘오병이어 이적’에 대한 물음을 던진 적이 있다. 정 추기경은 깊은 묵상을 통해 답을 했다. 그것은 ‘예수의 빵’이 아니라 ‘예수의 뜻’에 무게를 싣는 답이었다. 정 추기경은 이렇게 말했다. “사람들 사이에는 ‘친밀도’가 있다. 가장 친밀한 이들이 가족이다. 그 다음에 학벌로 뭉친 이들, 이권을 위해 모인 사람들 등이다. 그럼 가장 친밀도가 낮은 이들은 누구일까. 시장에 모인 사람들이다. 그들은 서로 언제 볼지 모르는 사람들이다. 그래서 마음을 안 여는 사이다. 갈릴리 호숫가 언덕에 모인 이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이었다.”

그랬다. 예수 앞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은 서로 ‘모르는 사이’였다. 같은 부락에서 온 아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면 말이다. 그들은 한번 헤어지면 언제 다시 볼지 모르는 이들이었다. 정 추기경은 답을 이어갔다. “성경에는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불어났다는 기록은 없다. 하늘에서 떨어졌다는 이야기도 없다. 그럼 예수님이 보이신 진정한 기적은 뭘까. 다름 아닌 꼭꼭 닫혔던 사람들의 마음을 여신 거다.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 예수님의 사랑으로 이웃과 도시락을 나누게 하신 거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기적이다. 지금 우리에게도 그런 마음이 필요하다.”

정 추기경의 답은 파격이었다. 어찌 보면 민감하기 짝이 없는 물음이다. 그럼에도 추기경은 망설이지 않았다. 나는 오병이어 교회의 바닥에 새겨진 모자이크 조각 앞에서 눈을 감았다. 두 마리의 물고기. 그건 단지 물고기에 불과한 걸까. 다섯 개의 보리빵. 그게 단순히 보리로 반죽해서 구운 빵에 불과한 걸까. 그렇다면 오병이어 일화는 그야말로 ‘단순한 이적 일화’에 불과한 걸까. 더 이상의 파도는 내게 밀려오지 않는 걸까. 그 파도가 내 안에서 무언가를 깨어나게 하지는 않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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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화가 틴토레토의 1547년 작 ‘빵과 물고기의 기적’. 미켈란젤로의 소묘와 티치아노의 색채를 합한 듯하는 평가를 받았던 틴토레토는 동시대 화가인 엘 그레코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나는 오병이어 교회를 나왔다. 뒷산으로 올라갔다. 중턱쯤에 앉았다. 예수 당시에 갈릴리 주변의 산에는 식당이나 편의점이 없었다. 그래서 집을 나와 길을 나선 이들은 모두 도시락을 준비해야 했다. 갈릴리 산에 모인 수천 명의 군중도 그랬다. 그들은 이스라엘뿐만 아니라 이웃한 시리아와 요르단에서 온 이들도 꽤 있었을 터이다. 그런 여정에 도시락은 필수다. 굳이 장거리 여행이 아니어도 마찬가지다. 갈릴리 서편 티베리아스에서 북쪽인 가버나움으로 가더라도 도시락은 꼭 챙겨야 했다. 직접 걸어보면 안다. 만만찮은 거리다. 갈릴리의 산길에는 지금도 아무런 가게가 없다. 예수 역시 갈릴리의 산촌을 돌아다니며 설교를 할 때 도시락을 가지고 다녔을 터이다. 정 추기경은 그런 도시락을 꺼내서 사람들이 함께 나누었을 것이라고 했다. 그렇게 나누고서 남은 빵이 열두 광주리였다는 설명이다.

거세게 반박하는 사람들도 있다. “‘오병이어’는 예수님의 대표적인 이적이다. 예수님의 절대 이적을 희석시키지 마라. 다섯 개의 빵과 두 마리의 물고기로 수천 명을 먹인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걸 부정하지 마라. 예수님은 절대 권능을 가지신 분이다. 하느님의 아들이다. 그러니 그게 어려운 일이었겠나. 그냥 받아들여라. 거기에 진정한 믿음이 있다. 다시 말하지만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로, 다시 세 마리로, 나중에는 수천 마리로 늘어난 것이다. ‘오병이어’는 완전한 이적이다.” 이런 믿음을 가진 이들도 결코 적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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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 언덕에서 내려다 본 갈릴리 호수. 예수가 ‘오병이어’를 나눌 때도 산 아래에는 저런 풍경이 펼쳐져 있었을 터이다.

오병이어 교회의 뒷산에 섰다. 물음이 올라왔다. 그것은 “물고기 한 마리가 어떻게 두 마리로 바뀌는가. 그게 과학적으로 가능한가?”라는 식으로 따지는 물음이 아니었다. 그런 물음은 얕은 물음이다. ‘오병이어 일화’의 정곡을 찌르지 못한다. 우리의 내면에는 더 깊은 물음이 도사리고 있다. 그건 예수를 향해서 던지는 “왜?”라는 물음이기도 하다. “예수는 왜 수천 명의 군중에게 빵과 물고기를 건넸을까. 한끼 굶는다고 해서 사람들이 죽는 상황도 아니었다. 더구나 예수는 스스로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라고 하지 않았나. 그렇다면 빵과 물고기를 통해 예수가 진정으로 건네고자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

당시 풍경을 눈 앞에 그려보았다. 저기 저쯤에 예수가 앉았을까. 그럼 군중은 저 아래에 앉았겠지. 5000명이 넘었으니 산 중턱에 가득했을 터이다. 여기도 동그랗게, 저기도 동그랗게 둘러앉았겠지. 예수는 그들을 향해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빵과 물고기를 들고 하늘을 향해 기도를 올렸다. 모든 사람들이 그 광경을 쳐다봤을 터이다. 그리고 고개를 갸우뚱하지 않았을까. ‘아니, 저분이 뭘 하려고 하는 거지? 아, 물고기 두 마리와 빵 몇 개로 저녁식사를 하려고 하시나? 그래서 감사 기도를 올리는 건가?’ 다들 그렇게 생각했을 터이다. 예수가 제자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식전 기도를 한다고 여겼을 터이다. 이어지는 예수의 행동은 상상을 초월했다. 예수가 떼어낸 빵과 물고기는 제자들의 입을 향하지 않았다. 군중을 향했다. 예수는 고작 몇 개의 빵과 물고기를 오천 명을 향해 건네기 시작했다. 나는 이 광경이 바로 ‘오병이어 일화’의 핵심이라고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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벨기에의 100프랑짜리 동전에 얼굴이 새겨져 있는 화가 람베르트 롬바르드(1505~66) 작 ‘빵과 물고기의 기적’.

감히 엄두라도 낼 수 있을까. 몇 개의 빵과 물고기로 5000명이 넘는 군중을 먹이겠다는 생각 말이다. 만약 똑같은 상황이 우리 눈 앞에 펼쳐진다면 어떨까. 누가 과연 두 마리의 물고기를 들고 수천 명을 향해 팔을 벌릴 수 있을까. 그들을 향해 물고기를 떼어줄 수 있을까. 어림도 없다.‘맨 앞줄만 먹이다가 물고기가 바닥나 괜히 창피를 당하지 않을까.’ 우리는 그런 걱정만 할 뿐이다. 그런데 예수는 달랐다. 우리의 눈에는 빤히 보이는 ‘대책 없는 무모함’을 예수는 주저 없이 시도했다.

나는 종종 ‘오병이어’ 광경을 떠올린다. 내가 떠올리는 풍경 속에는 그때마다 비가 내린다. 눈에 보이지 않는 소나기다. 수천 명을 향해 다섯 개의 빵을 나누기 시작하는 예수의 모습. 거기서 예수는 빵만 떼어냈을까. 자신의 내면에 깃든 ‘신의 속성’까지 함께 떼어내지 않았을까. 그걸 예수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지 않았을까. 그래서 비가 내린다. 누구는 그걸 ‘사랑’이라 부르고, 누구는 또 ‘연민’이라 부른다. 그래서 사랑의 비가 내리고, 연민의 비가 내린다. 그런 빗줄기가 갈릴리 언덕을 적셨다. 그리고 사람들을 적셨다. 바짝 말라 갈라진 논바닥 같던 사람들의 마음이 ‘예수의 소나기’로 인해 흠뻑 젖었을 터이다. 그래서 깨어난 걸까. 그들 속에 잠자고 있던 ‘신의 속성’이 예수의 빗줄기로 인해 눈을 뜬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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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랑드르의 화가 요아힘 파티니르 작 ‘빵과 물고기의 기적’. 요아힘은 네덜란드파로서는 처음으로 풍경을 전문적으로 그렸다. 뒤러는 요아힘을 “훌륭한 풍경화가”라고 평한 바 있다.

가령 사람들이 도시락을 꺼냈다고 가정하자. 저마다 깊숙이 숨겨둔 도시락을 꺼내 낯선 이들과 나누기 시작했다고 치자. 그게 단순히 예수의 이적에 대한 ‘과학적 설명’에 불과한 걸까. 이런 설명이 정말 ‘예수의 이적’을 부정하는 걸까. 어쩌면 우리는 예수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겉으로 보이는 표징’과 ‘겉으로 보이는 이적’에 너무 매달리는 것은 아닐까. 그 와중에 ‘첫단추’를 잊어버린 건 아닐까. ‘예수는 왜 이 땅에 왔는가’ ‘예수는 왜 이적을 행했는가’하는 첫단추 말이다. 그건 하나됨을 위해서였다. 예수는 자신을 통해 신의 속성과 우리의 속성이 하나가 되게 하고자 했다.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이 땅에서도 이루어지게끔. 그래서 예수는 이 땅에 왔다.

그럼 ‘오병이어 일화’의 정곡이 보인다. 그건 물고기 한 마리가 두 마리, 세 마리로 늘어난 게 아니다. 빵 한 조각이 한 광주리, 두 광주리로 늘어난 게 아니다. 그게 과학적으로 사실인가, 아닌가가 아니다. 눈에 보이는 빵, 손에 잡히는 물고기. 그것만 따진다면 우리는 ‘육신의 생명’만 따지는 셈이다. 예수는 달리 말했다. “사람은 빵만으로 살지 않고,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산다.”(마태복음 4장5절) 그러니 예수가 오천 명을 먹인 것은 단순히 빵과 물고기가 아니었다. 예수가 먹인 것은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이었다. 다시 말해 그 말씀에 깃든 ‘하느님의 속성’이다. 그래서 끝이 없다. 쪼개고 또 쪼개도, 나누고 또 나누어도 ‘신의 속성’은 줄어들지 않는다. 말 그대로 ‘무궁무진(無窮無盡)’이다. 그런 ‘신의 속성’을 예수가 품고 있었다. 그게 예수 안에 깃들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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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 대성당의 프레스코화를 그렸던 이탈리아 화가 지오바니 란프란코(1582~1647) 작 ‘오병이어 기적’.

그러니 광주리는 바닥을 드러내지 않는다. ‘신의 속성’에는 바닥이 없다. 예수가 필립보에게 던졌던 물음을 다시 꺼내본다.“저들이 먹을 빵을 우리는 어느 곳에서 구해야 할까?” 나는 ‘어느 곳(whence, which place)’이란 단어에 주목한다. 이 말은 광야에서 예수가 악마를 꾸짖으며 했던 말과도 통한다. “어디서 빵을 구할까?”라는 예수의 물음에 필립보는 ‘빵 가게’나 ‘근처의 마을’을 떠올렸다. 그걸 통해 예수는 필립보의 안목을 시험했던 걸까. 만약 똑같은 물음이 우리에게 날아오면 어떨까. “저토록 많은 사람이 있다. 저들을 먹일 빵을 어디서 구할까?”라는 예수의 물음에 우리는 뭐라고 답을 할까. 필립보처럼 엉뚱한 답을 하지 않으려면 내가 찾고 있는 ‘빵’부터 알아야 한다. 스스로 그걸 먼저 물어야 한다.

“내가 찾는 빵은 어떤 빵인가. 갈릴리의 언덕에서 예수가 행했던 이적의 빵. 한 개가 둘, 셋, 넷으로 마구 불어나 결국 수천 명을 먹이는 빵. 그런 빵인가. 아니면 하느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의 빵인가. 그 빵에 깃든 신의 속성인가.” 우리는 그것부터 물어야 하지 않을까. 예수의 이적이 과학적 사실인가, 아닌가를 따지기 전에 말이다.

<29회에서 계속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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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호 기자 vangogh@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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