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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없는 세상에 비밀 감추려했던 클린턴에 쏟아지는 비난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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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일 9·11 테러 추모 행사에서 힐러리 클린턴이 부축을 받으며 자리를 떠나 건강 문제가 제기됐다. 휘청거리는 모습이 촬영된 영상 캡처. [사진 트위터, AP=뉴시스]

11일(현지시간) 9·11 테러 15주년 추모행사에 참석했다 휘청거리며 사실상 졸도상태에 빠졌던 힐러리 클린턴 미국 민주당 대선후보의 ‘지나친 비밀주의’가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사건’이 발생한 이후에도 관련 사실을 숨기고 쉬쉬하다 ‘지나가던 행인’이 트위터에 비틀거리는 영상을 공개한 이후 몇 시간이 지난 뒤에야 이틀 전 의사로부터 ‘폐렴 진단’을 받은 사실을 인정했기 때문이다.

당일 행사는 오전 8시 30분에 뉴욕의 ‘그라운드 제로’ 건물에서 시작됐다. 당초 낮 1시까지 진행될 예정이었으나 클린턴은 1시간 30분이 지난 오전 10시경 슬그머니 자리를 떴다. 취재진에게도 비밀로 부쳤다. 사람들 눈을 의식했는지 들어온 정면 입구가 아닌 다른 곳에서 차량에 탑승하려 했고, 때문에 클린턴은 자신의 밴 전용차량이 도착하는 걸 기다려야 했다. 이 때는 이미 클린턴의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었다.

차량이 도착해 경호원들의 삼엄함 경계 속에 클린턴이 탑승하려는 순간 클린턴은 몸을 가눌 수 없는 지경이었고 거의 쓰러지다시피 하면서 차 안으로 들어갔다. 이를 휴대전화로 찍은 건 지나가던 행인이었다. CNN 등 어떤 언론사 기자도 없었다. 하지만 클린턴 캠프는 ‘숨어있는 눈’이 있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했다.

이후 클린턴 캠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클린턴이 사라진 사실을 알아 챈 ‘클린턴 담당기자’들이 이유를 묻자 어쩔 수 없이 둘러댄 것이 “더위를 먹고 딸(첼시)의 뉴욕 집으로 쉬러 갔다”는 것.

상황이 급반전한 건 오전 11시31분.

클린턴의 ‘반 졸도’를 찍은 행인이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동영상을 올리자 금세 퍼지기 시작했다.

정치전문지 ‘폴리티코’가 12일 클린턴 측근을 인용해 보도한 바에 따르면 클린턴은 에어컨이 켜진 전용차량에 올라 음료수 ‘게토레이’를 다량으로 마신 뒤 정상으로 돌아왔다고 한다. 측근 들과도 전화 통화하며 이미 딸 첼시의 아파트에 도착한 다음 손주들과 놀 정도로 회복했었다는 것이다. 뉴욕의 클린턴 자택으로 바로 돌아갈 참이었다. 그러나 관련 동영상이 공개된 사실이 알려지면서 부산해졌다. 취재진에게 클린턴의 ‘건강한 모습’을 확실히 보여줘야 했기 때문이다. 캠프는 그때서야 ‘담당 기자’들에게 첼시의 아파트 앞으로 모여달라 연락했다. 취재진이 다 모일 때까지 기다렸던 것이다. 클린턴이 바이러스에 ‘감염’됐다는 소문을 불식시키기 위해 아파트 앞에서 포즈를 취할 때 지나가는 소녀와 포옹을 하는 각본까지 짰다고 한다.

이 연출이 끝난 뒤 오후 5시가 다 되서야 클린턴 캠프는 “실은 금요일(9일)에 담당의사로부터 폐렴 진단을 받았다”고 공개했다. 한마디로 행인이 우연히 찍은 휴대전화 동영상 하나가 미국의 유력 대선후보가 숨기려했던 비밀을 온 세상에 드러내게 한 것이다.

상황이 이렇자 이날 민주당 지지자들까지 클린턴의 비밀주의를 맹공하고 나섰다. 투명하지 못한 비밀주의가 사태 해결은커녕 오히려 화만 키우고 있다고 비판한 것이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백악관 선임고문을 지낸 데이비드 액설로드는 이날 트위터에 “폐렴은 항생제로 고칠 수 있다. 그런데 불필요한 문제(의혹)를 계속 야기하는 클린턴의 건강하지 못한 '프라이버시 사랑'은 무엇으로 치료하나?”고 꼬집었다.

평소 클린턴에 우호적 보도를 하던 CNN·워싱턴타임스 등 기성 언론들도 자신들이 ‘일요일 사건’을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일반 행인에 ‘특종’을 빼앗긴 사실에 분노했다. CNN은 이날 오전 클린턴 캠프의 대변인과 인터뷰하면서 “행인에 의해 동영상이 공개 안 됐으면 당신들은 폐렴 진단 사실을 공개 안했을 것 아니냐”고 추궁하기도 했다.

클린턴 캠프는 대선전의 최대 위기임을 직감한 듯 ‘낮은 자세’로 임했다. 캠프의 제니퍼 팔미에리 대변인은 “어제(11일) 좀 더 잘 대처할 수 있었는데…”라며 아쉬워했고, 또 다른 대변인 브라이언 팰런은 “그것은 우리 참모들 책임이다. 후회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폴리티코는 “실은 외부 뿐 아니라 캠프 내부도 클린턴이 폐렴 진단을 받은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며 “알고 있었던 건 클린턴 가족, ‘수양딸’로 불리며 문고리 권력을 행사하는 후마 애버딘, 차기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거론되는 셰릴 밀스 전 국무장관 비서실장 뿐이었다”고 전했다. 나머지 캠프 관계자들은 동영상이 공개된 뒤 애버딘이 보낸 단체 이메일을 통해 알게 됐다는 것.

클린턴 주변 인사들은 “퍼스트레이디 시절 화이트워터 사건(부동산 개발 사기사건), 르윈스키 스캔들 등을 겪으며 당했던 트라우마 때문에 비밀주의가 깊어졌다”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나 클린턴은 자신에 쏟아지는 비난을 의식한 듯 이날 밤 CNN의 전화인터뷰에 응하며 사태 진정에 나섰다. 그는 “전날(11일) 어지러움을 느껴 균형을 잃었지만 의식을 잃지는 않았고 지금은 몸이 많이 좋아졌다”고 말했다. 클린턴은 “(폐렴 진단 후) ‘5일간 쉬라’고 얘기를 들었는데 그 현명한 조언을 따르지 않았다”며 “얼른 이겨내고 2∼3일 이내에 선거운동에 복귀할 것”이라고 말했다. 폐렴 진단 사실을 미리 공개하지 않았다는 비난에 대해선 “그렇게 큰일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피해 나갔다.

이에 앞서 남편인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이 CBS와의 인터뷰에서 “아내는 아주 오래 전에도 한 번 이상 심각한 탈수로 비슷한 증상을 보인 것이 있다”고 말한 데 대해선 “내 기억으론 (비슷한 증상이) 딱 두 번 있었다”며 “보통은 알고 피할 수 있지만 어제 9.11 행사는 내게 매우 의미있는 행사라 많이 마음을 쏟은 상황이었다”고 주장했다.

한편 가디언지는 이날 “클린턴은 (비밀주의를 벗어나) 신뢰를 되찾기 위해 과거 월가에서 했던 연설문을 공개하고, 클린턴재단에서 자신이 했던 역할을 보여 줄 기록들을 공개하라”며 “또 4년 전 뇌진탕 당시의 치료기록을 포함 아무것도 숨기지 말고 공개하라”고 촉구했다.
클린턴과 도널드 트럼프 진영 모두 이르면 이번 주 중 자세한 건강 기록을 공개한다는 방침이다.

워싱턴=김현기 특파원 luckyma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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