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직선제냐, 내각책임제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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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국회는 앞으로 어떤 개헌안을 만들어낼지 아직 윤곽이 드러나지 않고 있다. 대통령직선제냐, 내각책임제냐, 아니면 이들 두 제도의 절충식이냐, 논의만 분분할 뿐이다.
그런 가운데서도 분명한 사실은 여당쪽에선 대통령 직선제를 반대하고 있으며, 야당 쪽에선 대통령직선제를 완강하게 고집하고 있는 것이다. 권력구조에 관한 한 각자 흑과 백의 입장으로 대치되어 있다.
물론 이들 흑과 백은 그 나름의 배경과 근거가 있다. 여기 그것을 모두 소개하기엔 너무 장황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의 논리자체가 하나도 신기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대통령직선제나 내각책임제는 어제오늘에 생긴 제도가 아니다. 내각책임제는 이미 영국에서 1721년 「월폴」내각이 탄생한 이래 2백60여년 동안 지켜온 정부형태다.
대통령중심제 역시 미국에서 2백년 가까이 시행되어 오고 있다.
이들 전형적인 두 나라를 두고 누가 민주국가가 아니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것이 어떤 제도이든 민주주의를 방아들이고 또 그것을 제대로 실천하는 한 그것으로 「민주국가」에 부족함이 없다.
영국이 대통령직선제를 채택하지 않아서 덜된 민주국가이고, 미국이 내각책임제를 받아들이지 않아 민주주의를 제대로 펴지 못한다고 말하면 사람들은 웃을 것이다. 이들 두 나라는 도리어 앞으로도 자신들의 제도를 보다 굳건히 더 잘 지켜가야 하고, 또 지킬 가치가 있다고 확신하고 있다.
한마디로 내각책임제나 대통령중심제는 분명한 우열을 따질 수 있을 정도로 결정적인 결함을 갖고 있는 제도가 아니다. 이미 모든 실험과 체험과 검증이 끝난, 의심할바 없이 각기 훌륭한 제도다. 물론 각기 약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약점은 이들 제도의 강점을 압도할 만큼 우세하지 못하며 운영상 부단한 수정과 보완과 구제로 능히 극복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두 제도는 인류 역사발전과 운명을 같이할 것이다.
우리는 지금 내각책임제든, 대통령중심제든, 아무 제도나 골라잡자는 얘기를 하려는 것은 아니다.
세상엔 구름 위에 뜬 무지개 같은 제도란 있을 수 없다. 그것은 한 이상론으로는 가능할지 모르지만 흙을 밟고 사는 인간세계에선 이상과 현실이 공존한다.
따라서 대통령중심제냐, 내각책임제냐 하는 선택은 시간과 공간의 요소를 함께 넣어서 적절히 판단해야 한다.
역사적 현실에서 어떤 것이 더 안 당하냐가 문제일 뿐이다.
지금 이 시대와 미래의 한국, 그리고 우리와 우리의 후손을 위해 바로 이 땅 한반도 위에서 필요한 제도가 어느 것이어야 하느냐를 판단의 기준으로 삼아야 한다는 말이다.
실로 어려운 판단이요, 결단이다. 생각 같아서는 여러 제도를 내세워 국민들로 하여금 그중 하나를 선택하게 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정치인의 책임회피이며 또 다른 혼란을 불러들이는 우가 될 수도 있다.
구미의 구유 선진국들은 사회여론의 공기인 신문들이 여론을 반영하고 여론을 선도하는 역할을 한다.
미국의 신문만 해도 대통령선거 때면 『우리는 아무개를 지지한다』는 입장을 서슴없이 밝힌다.
지난 84년 대통령선거 때도 워싱턴포스트지와 뉴욕타임즈지는 「먼데일」후보를 지지하는 사설을 썼었다. 개표결과는 거꾸로 나왔지만, 이들 신문은 당당하게 자신들의 논리와 신념을 제시했다.
신문의 논조가 이쯤 되려면 그 사회의 구유 토론적 분위기가 보장되어야 하고, 또 사회의식도 그만큼 성숙되어 있어야 한다. 국민 또한 그런 것을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음미하는데 익숙해 있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그런 나라를 만들고 그런 국민이 되기 위해서 진통도 겪고, 헌법도 고치려고 하는 것 아닌가.
다만 이 순간만은 「불편부당」을 사시로써 표방한 우리 신문의 입장을 스스로 존중하며 어느 편을 들기보다는 더 중요하고, 더 긴요한 문제에 관해 언급하려고 한다.
국회의 헌법특위는 「제도론」에만 집착해서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어느 제도가 더 좋고, 어느 제도는 나쁘고 하는 논란을 계속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왜? 이미 수백년을 두고 역사적으로 실험했던 제도를 놓고 우리가 다시 처음부터 그 우열을 외형적으로 논한다는 것은 부질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새삼 우리의 헌정사를 돌아보아도 38년 동안 무려 여덟 차례의 개헌을 해야했지만, 그것은 민주주의를 여하히 지키고 발전시켜 가느냐하는 문제와는 별 상관이 없었다.
권력을 계속 장악하려는 세력과 권력을 빼앗으려는 세력과의 갈등과 분쟁의 산물로 개헌이 거듭되곤 했었다.
오늘 우리는 이미 결론을 다 알고 있는 제도론 만의 시비나, 집권의 변의 수단을 위한 특정제도만을 고집하는 일로 시한이 얼마 남지 않은 이 귀중한 시각을 헛되이 보내는 것에 개탄을 금치 못한다.
지금이야말로 헌특에 참여할 정치인들은 당리당략에서 한걸음 물러나 나라와 국민을 먼저 생각하며 민주주의를 발전시켜 가는 문제에 전심전력할 때다.
정당에 매인 정치인을 보고 당리당략을 버리라는 얘기는 이치에 닿지 않는다고 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리당략에 묶여있는 한은 헌특은 한 발짝도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좌초하고 말 것이다.
「헌특」이 좌초하면 무슨 일이 벌어질까. 그것은 큰 정치도, 큰 타협도 아닌 큰 혼란과 큰 파국뿐이다. 이제 혼란에 빠지면 무엇으로 수습할 수 있겠는가.
그때는 국제적 신인도 잃고 경제개발도 오유로 돌아간다.
지금 우리가 간곡히 충언하고 싶은 것은 「정치적 대타협」의 길을 모색하라는 것이다. 그것만이 패자 없는 모두가 승자일 수 있는 큰 정치다.
또 그것은 가장 국민을 위하는 길이고, 국민의 여망에 따르는 길이다.
무엇을 위한 타협이냐고 묻는 다면 그 대답은 너무도 명백하다. 민주주의를 위한 타협이다. 민주주의를 위해 타협하는데 여가 어디 있으며, 야가 어디 있는가.
민주주의를 하자는 이 시대의 대세를 민주정치의 기술이 모자라 받아들이지 못한다면 그보다 더한 난센스가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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