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가 바뀐다] 下. 외주프로 확대의 허와 실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07면

"케이크인 줄 알았는데 아이스크림이네."(B아이스크림)

"삼촌 건강하게 사시라고 사왔어요."(H생식)

"어, 핸드폰으로도 주가를 확인할 수 있어?"(N이동통신서비스)

광고의 한 장면이 아니다. 지난 봄 최고의 인기를 누렸던 드라마 '올인'의 마지막회에 등장한 대사들이다. 극의 흐름과 무관한 이들 홍보성 대사에 시청자들은 어안이 벙벙했다. "그동안 '노출'이 덜 됐다고 협찬 회사들이 불만을 토로해 어쩔 수 없었다"는 게 제작진의 뒤늦은 해명이다.


기록적인 시청률을 올린 '올인'은 국내 방송계의 외주(外注)제작 시스템이 갖는 문제점을 집약적으로 드러낸 장이기도 했다. 외주제작이란 KBS.MBC.SBS 등 방송사가 프로그램을 자체 제작하지 않고 외부에서 만든 것을 사다 쓰는 시스템.

일반엔 생소하지만 이 제도가 도입된 지 올해로 이미 13년째다. '방송 프로그램의 다양화' '문화 콘텐츠 산업의 저변 확대'라는 취지하에 그간 외주 프로의 편성비율이 차츰 늘어나 현재 SBS는 전체 프로의 40.9%, MBC 35%, KBS는 31.5%를 차지한다.

문제는 외주제작의 취지가 그럴싸하고 외형상으로 큰 진전을 이뤘음에도 불구하고 그간 제도의 허점을 틈타 방송계에서 갖가지 파행과 불협화음이 끊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피해는 시청자에게 돌아간다.

'올인'의 경우처럼 협찬사 간접광고가 지나친 것이 대표적인 문제점이다. 독립제작사들은 방송사에 비해 인적.물적 인프라가 부족해 장비 임대료 등 돈 들어갈 일이 많다.

게다가 방송 3사의 자체 프로에선 규정 때문에 회당 2백만~3백만원의 출연료를 받는 스타들이 외주 프로에선 몇배의 몸값을 부르는 게 관행. 따라서 방송사가 주는 제작비만으론 프로를 만들기 어렵다는 게 제작사들의 이구동성이다. 현행 방송법 시행령이 유독 독립제작사에만 협찬을 허용한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협찬은 광고 효과가 큰 드라마에만 몰리기 때문에 전체 외주 프로에 혜택이 돌아가지 않는 데다 최근엔 협찬 대행 브로커까지 등장해 과열 양상을 빚는 등 폐해가 커지고 있다.

특히 올해 초 SBS 드라마 '별을 쏘다'의 협찬사였던 하프플라자가 지명도가 높아진 것을 발판 삼아 사기행각을 벌이기도 했다. 이 때문에 "정부가 인력 양성이나 촬영.편집장비 제공 등 기본적인 지원책부터 마련해야 한다"(김평호 단국대 방송영상학부 교수), "방송시간의 30% 이상을 외주 프로로 메우는 만큼 방송사가 지급하는 제작비도 이에 맞춰 현실화해야 한다"(강영권 독립제작사협회 부회장)는 지적이 나온다.

저작권 등에 관한 계약이 방송사에 유리하도록 된 관행도 외주제작 시스템의 발전을 가로막는 요소로 꼽힌다. 단적인 예로 '올인'의 경우 드라마는 대박이 났지만 제작사인 초록뱀미디어는 손해를 봤다.

"협찬금은 스타들의 출연료를 대기에도 모자랐다. 더욱이 해외판권을 SBS프로덕션이 1백% 갖도록 계약했기 때문에 제작사에 돌아오는 이익은 한푼도 없다"고 이 회사 관계자는 털어놨다.

한류 열풍을 타고 해외판권이 황금시장으로 부상한 데다 케이블.인터넷.위성방송을 위한 콘텐츠 확보전이 치열하다 보니 외주 프로의 저작권을 둘러싸고 방송사.제작사 간에 신경전이 치열하다. 하지만 공정한 거래를 보장해줄 표준계약서가 없어 칼자루를 쥔 방송사 입맛대로 갈 때가 많다고 제작사들은 볼멘 소리다.

물론 예외가 있긴 하다. '여름향기'의 제작사인 팬엔터테인먼트는 당초 KBS가 해외판권을 1백% 갖겠다고 주장하자 SBS로 옮기겠다는 '카드'를 들이댄 끝에 수익을 5대5로 나누는 양보를 얻어냈다.

'유리구두'를 만든 김종학프로덕션은 SBS에서 제작비를 전혀 지원받지 않는 대신 해외판권을 1백% 확보하기도 했다. "질 좋은 외주 프로가 탄생하려면 저작권 문제 해결이 관건"이라고 이 회사의 박창식 제작이사는 강조한다.

케이블 회사인 Q채널이 올해부터 외주 제작사와 제작비를 반반씩 대는 대신 판권도 5대5로 나누는 제도를 도입한 것을 지상파 방송사들이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이 밖에 외주제작의 문제점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대다수 외주제작사가 영세하다 보니 충분한 제작능력을 갖추지 못해 오히려 방송프로의 질을 저하시킨다는 주장도 만만찮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방송정책 당국도 외주 문제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방송위원회는 이달 말께 나올 용역 연구 결과를 토대로 외주제작 시스템 전반을 뜯어고칠 제도 개선에 착수할 예정이다.

신예리 기자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