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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북소년 사커 페인팅, 떠도는 사진 모아 재가공…예술의 확장을 보여주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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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7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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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 2016’에 선정된 김을 작가는 27.5m 벽면을 1450점의 드로잉으로 채웠다.

저마다 자기 세계가 뚜렷한 미술가에게 수상제도는 큰 뜻이 없어 보이지만, 화단 입문이나 격려·후원의 방법으로 활용되기도 한다. 국립현대미술관이 2012년부터 SBS문화재단과 열어온 ‘올해의 작가상’은 기성 작가에게 창작의 동력을 실어주는 외에 ‘오늘, 여기’에서 벌어지는 미술 행위의 흐름을 살피는데 의미가 있다.

국립현대미술관 ‘올해의 작가상’전

‘올해의 작가상 2016’에 이름을 올린 이는 김을·백승우·함경아 세 명과 조지은·양철모씨로 이뤄진 팀 ‘믹스라이스’ 였다. 31일 서울 삼청로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개막한 올 전시는 창작자로서의 자아를 꾸려나가는 노고 외에 이 땅에서 예술가로 살아가는 시대적 소명에 대한 나름의 고민을 털어놓은 자리였다.

김을(62)씨는 온 몸을 던져 그림에 헌신해온 자신을 탈탈 털어 보여주었다. 실제 작업실을 옮겨다 놓은 듯한 2층 가건물 ‘트와일라잇 존 스튜디오’와 그 맞은편 27.5m 길이 벽면을 가득 채운 1450점 드로잉은 지난 20년 그의 삶을 응축한 자화상이었다. “나의 뼛가루로 빚은 눈물 한 방울은 나의 마지막 드로잉이 될 것”이라는 작심의 깊이가 ‘야화(野畵)’라 이름붙인 그의 드로잉을 관통하고 있다.

백승우(43)씨는 포토그래퍼(photographer)라는 전통적 분류를 거부하고 픽처그래퍼(picture-grapher)라는 새 작명을 강조했다. 진실이나 사실을 보여주는 기존 사진의 기능은 시효가 만료됐고 새 맥락에서 바라봐야 한다는 문제제기다. 디지털 이미지 과잉 시대에 세상에 떠돌아다니는 수많은 사진을 수집해 맥을 잡고 변형, 재가공해 새 의미를 덧입혀 내놓는 ‘자신만의 이야기 쓰기’를 강조한다. ‘기록보다 기억’이라는 주관성의 사진이다.

함경아(50)씨는 단단하게 구축된 시스템의 틈새를 집요하게 노린다. 북한 자수공예가와의 협업이 한 예다. 이번에는 ‘돈과 가치’의 모순에 도전했다. 작품 지원금을 탈북자를 위한 경비로 쓰고, 축구에 재능을 보인 탈북 소년의 ‘사커 페인팅(soccer painting)’을 퍼포먼스로 선보였다. 군사적 목적의 위장물인 ‘카무플라주’의 패턴을 떠낸 조각은 분단시대의 김빠진 기념비처럼 보인다.

조지은(41)·양철모(39)씨의 ‘믹스라이스’는 한국 사회 이주 노동자의 현실에 천착했던 태도를 강제 이식되는 식물로 확대 심화해 도시화 과정에서 펼쳐진 인간과 식물의 이식(移植) 문제를 다룬다. 돈을 주고 시간을 사는, 즉 노거수(老巨樹)를 사다가 심는 행위 속에 파괴되는 공동체의 무력화는 얼핏 닮아 보이지만 재배치되는 나무들은 힘이 세다. 영상물 ‘덩굴 연대기’는 프랑스 소설가 미셸 우엘벡의 장편소설 『지도와 영토』의 마지막 문장, “이윽고 정적이 흐른다. 오직 바람에 풀들만이 하늘거릴 뿐, 식물의 압승이다”를 떠올리게 한다. 식물의 이데올로기는 인간의 그것보다 우주에 더 가깝게 고양된 속성을 지닌다.

오는 10월 13일 ‘2016 올해의 작가’ 1인(팀)을 최종 선정해 발표하고 1000만원 후원금을 시상한다. 내년 1월 15일까지. 02-3701-9500.

글·사진=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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