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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헌」벽 뚫고「임기 내 개헌」관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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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신민당의 개헌추진 위 시·도 지부결성대회 및 현판식이 지난 31일 전주대회로써 사실상 마감됐다.
춘천대회의 일정이 잡혀있고(14일) 인천대회도 다시 치러야 한다는 주장이 없는 것은 아니나 국회에 헌특이 구성되면 장외 개헌행사는 중지키로 거의 의견이 모아진데다 대회를 갖는다해도 개헌논의의 장내진입과 함께 본래의 의미는 퇴색해졌기 때문이다.
2·12 기습서명을 신호탄으로 시작된 신민당의 장외투쟁은 3월 11일 서울을 시발로 하여 부산·광주·대구·대전·청주·인천·마산·전주 등 전국을 순회한 끝에 정국에 엄청난 변화를 몰아왔다.
개헌열기를 전국에 확산시키면서 철벽같던 정부·여당의 「호헌」 껍질을 깨뜨리고 「임기 내 개헌」이란 알맹이를 끄집어내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신민당은 자평하고 있다.
당사 봉쇄·연행·연금·노상회의 등 스산하던 장면들과 헌특 구성에 합의하고 나란히 웃는 여야 대표의 포즈를 비교해볼 때 『세상 많이 달라졌다』는 말을 실감케 한다.
개헌추진결성대회가 본궤도에 오른 것은 두 번째 대회였던 부산대회 때부터였다.
서울대회는 시민들의 자발적 참여만을 기대한 결과 청중동원에 실패했고 이를 교훈 삼아 부산에선 조직적인 청중동원에 나섰으며 김영삼 고문의 개인적 인기에도 힘입어 「성황」을 이루는데 성공, 본격 발진을 한 셈이다.
뒤이어 열린 광주대회는 지역 특유의 분위기가 편승돼 엄청난 인파가 집결함으로써 열기가 고조되었다.
광주에선 끝내 젊은 층의 격렬한 시위가 뒤따랐고 그날부터 발사된 경찰의 최루탄은 엊그제 전주대회 때까지 계속됐다.
대구·대전·청주대회를 거치는 동안 신민당은 KBS 시청료 거부 및 뉴스시청 거부운동을 병행함으로써 쟁점을 확산시켰다.
그러나 이때부터 재야단체와 학생 등 운동권에 의한 별도집회 및 시위가 등장, 행사는 이원화 양상을 보였으며 주도권이 이들 쪽으로 옮겨가는 듯한 추세여서 우려와 고민을 갖기 시작했다.
『독재타도』의 구호는 똑같았지만 『헌법개정』과 『헌법제정』등 목소리는 서로 달라지고 있었다.
한쪽에서 『이민우』 『김영삼』 『김대중』을 외쳐대면 한쪽에선 『민주쟁취』를 더 크게 외쳐 특정인에 대한 지지의 소리를 잠재우기도 했다.
그래도 그때까지는 개헌이라는 공동의 목표아래 운동권의 목소리가 신민당의 「짐」이 되지는 않은 상태였으며 신민당으로선 대회마다 1천, 2천명씩 동원하여 벌이는 이들의 조직적 행동에 고마움까지 느끼는 입장이었다.
그러나 여야 타협국면이 확실해진 4·30 회동 이후 5·3 인천대회부터 상황은 판이해졌다.
경찰과 재야운동권의 사전충돌로 신민당의 대회자체가 유산되고, 반 신민당 구호가 격렬하게 나옴으로써 양자의 협력관계에 분명한 한계를 노출시킨 장이 됐다.
4·30 청와대 회동으로 대화의 무드가 조성되자 재야 운동권은 반미·반제 등 과격 구호와 함께 신민당 비난을 본격화함으로써 신민당과 그들의 목표가 다름을 명확히 드러낸 것이다.
이에 따라 신민당으로선 2·12 총선 이후 지원세력이었던 이들의 힘을 자신들의 목표지점 도달 때까지는 계속 빌어야하는 필요성과 이들로부터 요구받고있는 급진·혁신방향으로의 동행을 뿌리쳐야하는 현실적인 고민에 직면하게됐다.
김 고문의 『민주화가 되면 혁신정당도 출현돼야한다고 생각한다는 전주발언은 이들 집단과의 타협안인 동시에 신민당의 보수노선 재확인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마산·전주대회는 경찰·신민당·재야의 상호 자제와 협조 속에 무사히 치러졌지만, 재야의 반 신민당 구호와 대여 타협 비판은 마찬가지였다.
3, 4, 5월에 걸쳐 전국 9개 주요도시에서 가진 결성대회를 통해 신민당은 『개헌투쟁에 대한 국민적 지지 확인을 얻었다』는 자체평가를 내렸다.
선거운동이나 다름없는 대 국민 홍보효과도 올렸으며 두 김씨는 대중정치인으로서의 위치가 건재함을 과시하는 부수 소득도 얻었다.
반면 그 동안의 지원세력이었던 재야 운동권과의 제휴한계가 노출된 점은 부정적 측면으로 평가되고있다.
민주화라는 커다란 테두리 속에 가려져 왔던 쌍방간의 체질차이와 견해차가 결성대회를 통해 여실히 드러난 것이다.
신민당은 그 동안 운동권의 급진요소와 행동력을 정치수단화 하여 활용했고 운동권 역시 자신들의 입장에서 신민당을 활용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신민당은 경우에 따라 타협에 의한 해결을 추구하는 현실 정치집단이며 재야 운동권은 진보성향의 집단이란 점에서 상호 이용하고 이용당하는 관계엔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이번에 노출된 한계는 상호불신을 불렀고 사회불안을 야기시키는 결과를 낳았으며 국민들로부터 경각심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결국 신민당도 민정당과 더불어 정국불안의 공동책임을 져야할 상황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긍정적 요소와 부정적 요소들이 복합작용 돼 신민당은 투쟁방향을 장내로 돌리는 대전환의 고비를 맞게됐다.
신민당은 앞으로 당분간은 원내로 체중을 옮겨 헌특을 통한 직선제 관철에 주력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원내에 몰두하기에는 협상을 반대하는 재야운동권의 압력과 동교동계의 구속자 석방 및 사면·복권문제에 대한 강경 입장 등이 계속 장애요인으로 작용할 것이다.
전주대회에서 새롭게 등장한 재야운동권의 직선제 관철·내각책임제 반대 구호와 김대중씨 연설중 구속자 석방문제 및 직선제에 대한 단호한 선언 등은 원내진입에서 큰 짐들로 꼽힌다.
헌특에서의 협상템포가 질·양면에서 지지부진하면 정부·여당 측의 약속위반을 들어가며 협상무기로써 다시 장외투쟁을 들고나올 공산은 크다.
그러나 신민당은 장 밖의 유혹을 끝까지 버리지 못하겠지만 지금까지 해온 결성대회 방식으로의 복귀는 어려울 전망이다.

<허남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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