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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M|디테일의 재발견] 연상호는 파고든다. 지옥 같은 세상의 밑바닥까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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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데이트

연상호(38) 감독은 현재 충무로에서 가장 뜨거운 이름이다. 첫 실사영화 연출작 ‘부산행’(7월 20일 개봉)이 관객 1100만 명을 넘기며 흥행한 데 이어, 그 프리퀄에 해당하는 애니메이션 ‘서울역’(8월 17일 개봉)이 관객을 만나고 있다. 그는 ‘부산행’과 ‘서울역’ 이전에도 그 어떤 실사영화보다 통렬하게 인간과 사회의 민낯을 파헤치는 애니메이션들을 발표해 왔다. ‘부산행’과 ‘서울역’, 두 작품을 잉태하기까지 단단하게 구축돼 온 연상호 감독의 영화 세계를 살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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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평생 지옥을 피해 도망치거나 결국 지옥에 가게 된다(‘지옥:두 개의 삶’(2006)). 먹고살기 위해선 그 어떤 짓이라도 할 수밖에 없다(‘사랑은 단백질’(2008)). 대부분의 사람은 자족하는 ‘돼지’의 삶을 살며 폭력으로 다스려진다(‘돼지의 왕’(2011)). 편하게 살고 싶은 각자의 이기심이 충돌하는 곳에 유토피아 따윈 없다(‘창’(2012)). 메시아는 없다. 사악한 사기꾼과 무지몽매한 사람들이 있을 뿐이다(‘사이비’(2013)). ‘나만 살면 된다’는 생각은 공멸로 이어진다(부산행). 그리고 이곳은 거대한 재난이 일어나고 있는, 말 그대로 ‘헬조선’이다(서울역).

'부산행','서울역'으로 확장된 지옥도, '연상호 월드' 집중 분석

연상호 감독이 그리는 세상은 암울하다. 그나마 ‘부산행’의 결말이 가장 희망적인 대목이다. 그의 영화는 궁극적으로 묵시록이다. 연 감독은 ‘이렇게 가다가는 이 사회가 한계점을 넘어 내부 모순에 의해 붕괴할 것’이라 믿는다. 그런 점에서 그는 구약 성경의 선지자를 연상시키는 동시에,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강한 회의를 보여 준다. 이러한 입장은 인간에 대한 묘사에서 잘 드러난다. 연 감독의 영화에서 인간은 괴물·좀비·동물 등과 큰 차이가 없는 존재다.

단편 ‘지옥:두 개의 삶’의 ‘파트1’에서 주인공은 육식 동물처럼 쥐를 뜯어 먹는다. 옴니버스 영화 ‘인디애니박스:셀마의 단백질 커피’(2008)에 수록된 ‘사랑은 단백질’에서는, 인간과 동물의 세계가 잔인하게 뒤섞인다. 아이러니하게도 닭은 ‘치킨집’을 운영하는데, 어쩔 수 없이 아들 ‘닭돌이’를 튀겨야 하고, 그가 보는 앞에서 인간들은 그걸 먹는다. ‘돼지의 왕’에서 인간은 개(지배자)와 돼지(피지배자)로 치환되며, 철(김혜나)은 “그 관계를 끊기 위해서는 괴물이 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부산행’과 ‘서울역’에서 좀비는 굶주린 짐승처럼 인간에게 달려들고, 인간은 그렇게 좀비가 되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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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단백질

연 감독의 영화에서 그려진 인간 세상은 이성적 판단과 합리적 사고가 통용되는 곳이 아니다. 먹고 먹히는, 밟고 밟히는, 죽고 죽이는 곳이다. 그렇다고 인간적인 가치가 완전히 외면되는 것은 아니다. ‘부산행’의 상화(마동석)에게는 강한 희생정신이 있고, ‘사랑은 단백질’의 경순(박진수)은 인정에 이끌려 치킨 먹기를 거부하고, ‘사이비’의 성철우(오정세) 목사는 사람들에게 연민을 느낀다. 하지만 연상호의 세계는 기본적으로 적자생존의 정글이며, 힘의 논리와 폭력이 지배하는 곳이다. 그런 곳에서 인간이 구원받을 리 만무하다.

인간은 가련한 희생자에 불과하며, 체제와 집단은 그들을 탱크처럼 뭉개고 지나간다. ‘서울역’에서 사람들은 좀비와 다를 바 없는 폭도로 규정돼 공권력(경찰)에 무자비하게 진압당한다. 학교(돼지의 왕)나 군대(창) 같은 시스템은 개인에게 트라우마를 남길 뿐이다. 그렇게 새겨진 상처는 평생 그들을 옭아매는 족쇄가 된다. ‘사이비’의 사람들은 무지하기에, 즉 참과 거짓을 구분하지 못하기에 가짜 구원에 매달린다. 그리고 수몰 지구인 마을은 곧 물에 잠길 것이다. 심판인 셈이다.


| 절망과 고통 속에서 스러진 사람들



이런 세상에서 살아가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그들은 힘겹게 겨우 살아간다. ‘지옥:두 개의 삶’에서는 갑자기 천사가 나타나 사람들에게 삶의 기한과 함께 천국으로 갈지 지옥으로 갈지 알려 준다. 지옥으로 가는 자는 처참한 고통을 겪게 된다. ‘돼지의 왕’의 경민(오정세)은 사업에 실패했고, 종석(양익준)은 가난한 대필 작가다. ‘사이비’의 영선(박희본)은 어렵게 대학에 합격했지만, 아버지 민철(양익준) 때문에 모든 것을 망친다. ‘서울역’의 혜선(심은경)은 가출 후 홍등가를 전전하다 결국 집으로 돌아가지 못한다.

이들의 삶을 가로막는 건 절망감이다. 죽음과 가난과 폭력 앞에서 그들은 어떤 출구도 찾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은 ‘지옥:두 개의 삶’의 남자처럼 무작정 도망치거나, ‘돼지의 왕’의 경민처럼 과거의 진실에 매달리거나, ‘사이비’의 영선처럼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사기꾼에게 매달린다. 하지만 희망은 없다. 그리고 그들은 결국 죽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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돼지의 왕

연 감독의 영화에 끊임없이 자살이 등장하는 것도 그런 이유다. 이런 세상에서 스스로 살아갈 힘이 없기 때문이다. ‘지옥:두 개의 삶’의 ‘파트2’에서 주인공의 엄마는 딸에게 “도망가”라는 유서를 남긴 채 지옥행을 택한다. ‘돼지의 왕’에서 경민의 선택도 결국 죽음이며, 철은 과거에 원치 않는 자살을 했다. ‘창’에서 고문관 영수(이수현)는 구타당한 뒤 자살을 시도한다. ‘사이비’의 영선 역시 아무 희망 없는 삶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자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 말고 다른 해결책도 있다. 폭력과 살인. 하지만 그 결과 역시 허무한 자기 파괴다. ‘지옥:두 개의 삶’에서 천국에 가기로 예정돼 있던 여자는, 연인과 정부(情婦)를 죽여 지옥으로 향하게 된다. ‘돼지의 왕’에서 철이 휘두르는 폭력은 점점 그 자신을 궁지로 몰아넣는다. ‘창’에서 철민(이환) 병장은 내무반 막내이자 ‘관심 병사’인 영수를 구타함으로써 나름 자랑스러웠던 군 생활을 참담하게 마친다. ‘사이비’에서 성 목사는 칼로 자신의 정의를 세우려 하지만 법의 심판을 받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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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행

이런 죽음의 향연은 결코 현실에 대한 과장된 비관주의로 느껴지지 않는다. 연 감독의 영화는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과 현실을, 이곳에서 우리가 이 모양 이 꼴로 살고 있음을, 인간이 지닌 나약함과 비열함과 사악함을 여과 없이 드러낸다. 그것은 죽음으로 상징화되기도 하고, 비루한 삶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며, 급박한 재난 상황으로 제시되기도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날카로운 묘사가 절대 경고 수준에서 멈추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는 이미 지옥이 된 세상을 관객의 눈앞에 적나라하게 들이댄다.

연 감독의 영화가 관객에게 충격을 준다면, 그것은 현실과 맺고 있는 팽팽한 긴장 관계 때문이다. 기독교적 사후 세계, 눈물 없이 먹을 수 없는 치킨 이야기, 어느 내무반에서 일어난 폭력, 종교 사기꾼, 좀비가 초래한 재난…. 어떤 주제를 선택하든 그는 이 사회의 메커니즘을 겨냥한다. 무엇이 우리를 맹목적으로 만들고 좌절시키며 극단적 이기주의로 내몰아 결국 죽음에 이르게 하는가. 연 감독이 만든 장·단편 애니메이션들과 한 편의 실사영화는 이러한 현실적 질문에서 단 한 번도 벗어나지 않는다.


| 판타지·낭만 대신 지독한 리얼리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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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비

연 감독이 작품 속에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지는 방식 역시 흥미롭다. 그는 ‘안티 애니메이션’이라 불러도 될 만큼 장르 특유의 판타지와 낭만성을 낱낱이 깨뜨린다. 연 감독의 애니메이션은 웬만한 실사영화도 획득하지 못하는 비수 같은 감각을 지녔다. 특히 두 가지 측면에서 그렇다.

먼저, 애니메이션의 영역 안으로 다른 장르를 매우 강하게 끌어들인다. 그는 애니메이션에서 하드고어 스타일의 호러나 스릴러 문법을 과감하게 구현한다. 독특한 것은, 그런 ‘쎈’ 장르적 요소 속에서도 리얼리즘을 잃지 않는다는 점이다. 그 균형 감각에 기대, 연 감독은 지속적으로 자신의 주제를 선명히 드러내 왔다.

둘째로는, 이야기가 지닌 강렬함과 의외성을 들 수 있다. ‘돼지의 왕’이 좋은 예다.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플롯은, 단지 구성 자체의 치밀함만으로 관객에게 호소하지 않는다. 연 감독은 이 영화에서 이야기의 내용과 형식을 탄탄히 결합시킨다. 과감한 앵글·편집·영상 효과로 만든 액션신과 환상신은, ‘돼지의 왕’을 단순한 드라마가 아닌 독특한 비주얼과 스타일을 지닌 작품으로 끌어올린다. 그가 첫 실사영화 연출작인 ‘부산행’에서도 나름의 성취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애니메이션에서도 이야기의 테마와 스타일을 효율적으로 결합해 영화적 효과를 만들어 냈던 그 능력 덕분일 것이다.

특히 ‘돼지의 왕’의 인물들은 지배-피지배 관계를 다루는 영화의 일반적 방식에서 벗어난다. 억압과 저항의 구도를 탈피하는 의외성을 선택한다. 중학생 시절의 경민(박희본)과 종석(김꽃비)은 힘 센 아이들에게 괴롭힘을 당하면서도 대들지 못한다. 오히려 자신들을 위해 싸우는 철을 모함하고 배반하며, 급기야 종석은 철을 제거한다. 이런 인간적 나약함은 연 감독의 인물들이 종종 드러내는 모습이자, 그가 인간을 바라보는 현실적 관점이기도 하다.

올여름 극장가에 실사와 애니메이션을 넘나드는 연작으로 강한 인상을 남긴 연 감독. 그의 작품은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그 진단은 가혹하고 어둡지만, 연 감독은 ‘그것이 현실이라면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한다. 한국 사회에 대한 부정할 수 없는 영화적 발언. 연상호 감독의 그 시선이 롱런하길 기원한다.


| 몸이 세 개라도 모자란, 제작자 연상호


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다다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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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니메이션 제작사 스튜디오 다다쇼를 이끄는 연상호 감독은, 제작자로도 탄탄한 필모그래피를 채워 가고 있다. 홍덕표 감독의 ‘발광하는 현대사’(2014)는 극장이 아닌 VOD 서비스를 통해 관객과 만났던 작품. 강도하 작가의 웹툰이 원작인 ‘19금’ 애니메이션이다.

그 컨셉트에서 일견 에로티시즘을 연상하기 쉽지만, ‘발광하는 현대사’는 현실적인 관점으로 남녀 관계에 접근한다는 점에서 기존 한국의 에로티시즘 애니메이션과 차별된다.

올여름 얄궂게도 연 감독이 연출한 ‘서울역’과 그가 제작자로 나선 ‘카이:거울 호수의 전설’(이하 ‘카이’)이 같은 날 개봉했다. ‘카이’는 스튜디오 다다쇼의 이전 영화들과 결이 다른 애니메이션. ‘마리이야기’(2002) ‘천년여우 여우비’(2007) 등으로 알려진 ‘한국 독립 애니메이션계의 큰형’ 이성강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안데르센의 동화 『눈의 여왕』을 한국적으로 각색한 판타지로, 소년 카이(김영은)가 마을을 지키기 위해 눈의 여왕 하탄(강진아)에 맞서다 잃어버린 동생 샤므이(박고운)를 만나게 되는 이야기다. “10여 년 전 몽골 여행 도중 이 영화를 기획했다”는 이 감독의 프로젝트는 연 감독을 만나 비로소 세상에 나올 수 있었다. ‘카이’는 스튜디오 다다쇼의 첫 ‘전체 관람가’ 작품이다.

스튜디오 다다쇼는 현재 하반기 공개 예정인 ‘졸업반’을 작업 중이다. ‘발광하는 현대사’처럼 극장이 아닌 IPTV 등을 통해 공개하는 방식으로, 연 감독이 시나리오를 쓰고 이번에도 홍덕표 감독이 연출을 맡았다. ‘졸업반’ 역시 어두운 연애 이야기가 될 것이라고 한다.

김형석 영화저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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