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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하는 목요일] 폭염 뚫고 달려온 아이들 “이렇게 맛있는 물 처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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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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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운 바람이 연신 얼굴을 때렸다. 35도가 넘는 무더운 날씨에 온몸은 땀으로 범벅이 됐다. 자전거 페달은 점점 무거워졌다. 목이 탔다. 결국 자전거를 세우고 잠시 쉬었다 가기로 했다. 생수병에 든 물은 미지근하다 못해 따뜻했다. 그 물이라도 들이켜니 살 것 같았다.

29명 자전거부대 제주도 모여
하루 물1L 마시며 240㎞ 일주
35도 폭염에 안장은 가마솥
함께 달린 기자는 첫날 기권
사흘새 기부금 1200만원 넘게 모여
인도네시아에 정수 필터 보내기로

지난 12일 제주도 바닷바람을 맞으며 자전거를 탔다. 이날부터 2박3일간 제주도 일주를 한다는 한 ‘자전거 부대’ 때문이었다. 가만있어도 땀이 주룩주룩 나는 삼복더위에 자전거라니…. 하지만 이들에게는 특별한 계획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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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 240㎞ 자전거 일주 중 가장 긴 구간을 소화한 13일 오후 서귀포시 덕돌포구에서 CFC팀 29명 멤버들이 손을 흔들고 있다. [사진 한국컴패션]

이번 일주는 충남 홍성에서 수의사로 일하는 강상규(40)씨가 1년 전부터 기획한 프로젝트다. 국제 어린이 양육기구 한국컴패션을 통해 개발도상국 어린이 3명과 결연을 맺게 된 강씨는 전 세계에서 많은 아이가 물 부족으로 목숨을 잃고 있음을 알게 됐다. ‘이 아이들을 위해 의미 있는 일을 하자’고 결심했을 때 눈에 들어온 게 집에 세워져 있는 자전거였다.

그 길로 강씨는 물 부족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자전거 부대 ‘CFC(Cycling for Compassion)’팀을 조직했다. 29명의 자전거팀과 26명의 응원팀이 모였다. 일주에 참여하지 않아도 취지에 공감하는 사람들은 온·오프라인으로 기부금을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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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전거를 타는 사람들은 한 가지 규칙을 정했다. 하루 제공되는 물의 양은 1L로 하되, 더 마시고 싶다면 1L당 1만원씩 기부하고 마시기로 했다. 목마른 아이들의 고통을 체감해 보자는 취지였다. 그렇게 240㎞ ‘고난의 일주’가 시작됐다.

#첫날 : “안장이 가마솥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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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연소 참가자인 성연욱(8)군이 물을 마시는 모습. [사진 한국컴패션]

CFC팀의 첫 집결지는 공항에서 21㎞ 정도 떨어진 제주시 애월읍의 한 교회였다. 이곳에는 한국컴패션 직원과 응원팀 멤버들이 꾸려놓은 간이 ‘워터뱅크’가 있었다. 워터뱅크에서 자전거팀 멤버들은 물을 사서 마실 수 있다.

오후 1시쯤 자전거팀 멤버들은 삼삼오오 교회 안으로 들어섰다. 최연소 참가자로 어머니 김정은(40)씨와 함께 자전거를 탄 성연욱(8)군은 “안장이 가마솥 같다”며 울상이었다. 그래도 “괜찮냐”는 질문에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코스부터는 기자도 자전거 부대에 합류했다. 협재해변 코스라 경치도 아름답고 길도 수월해 보였다. 하지만 이내 후회가 밀려왔다. 태양은 뜨겁고 딱딱한 안장 탓에 엉덩이가 아팠다. 한 시간쯤 지나니 바다 냄새에 속까지 울렁거렸다. 결국 외쳤다. “저, 여기까지만 할게요….”

결국 차를 타고 이날의 최종 목적지인 서귀포시 대정읍에 있는 교회로 갔다. 저녁이 되자 자전거들이 속속 도착했다. 빨갛게 익은 얼굴에는 노곤함이 역력했다.

#둘째 날 : “도대체 끝이 어딥니까”

3일 중 가장 긴 구간을 소화해야 하는 날이다. 첫 일정을 떠나기 전 강씨는 오전부터 팀원들의 몸과 자전거 상태를 꼼꼼히 체크했다. 팀원들은 2~3명씩 조를 짜 함께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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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네시아 등 물 부족국가에 기부할 정수 필터로 물속 이물질을 걸러내는 모습.

94㎞를 달렸다. 뒤처지는 사람도, 중도 포기하는 사람도 있었다. 자전거 바퀴에 바람이 빠지는 일은 허다했다. 날씨가 너무 더워 오후 2시쯤에는 잠시 일주를 중단해야 했다. 서울에서 온 문태찬(36)씨는 “오르막길이 계속 이어질 때는 그냥 ‘언제가 끝일까’ 이런 생각뿐이다”고 말했다.

단짝 친구인 70대 어르신 강영석(74)·이영태(72)씨도 그렇게 자전거 페달을 밟았다. 강씨는 이 프로젝트의 기획자인 강상규씨의 아버지다. ‘젊은 친구들에게 폐 끼치는 게 싫어’ 늘 조금 일찍 출발했던 두 사람은 가뿐히 이날 최종 목적지인 성산읍까지 달렸다. 강씨는 “이런 좋은 일을 죽기 전에 할 수 있어서 좋다”고 말했다.

#셋째 날 : “물 소중함 알았어요”

사실 하루 종일 자전거를 타면서 물 1L로 버티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아껴 마셔도 3L 이상은 마셔줘야 했다. 그래도 지갑을 여는 사람들의 표정은 어둡지 않았다. “살면서 지금까지 마신 물 중 제일 달콤하고 시원하네요. 물이 이렇게 소중한지 처음 알았어요.” 자전거 부대는 입을 모아 말하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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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참가자 가족이 땀을 닦아주고 있다.

그런 모습을 보며 기자도 다시 도전했다. 이날은 김녕해변에서 함덕해변까지 이어지는 10㎞ 구간이 첫 코스였다. 힘은 들었지만 이틀간 쉼 없이 달려온 이들을 생각하며 버텼다. 한참을 달리자 멀리 응원팀 사람들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도착해 자전거를 세워놓고 물을 마셨다. ‘아, 이 맛이구나!’

최종 골인 지점은 제주시의 한 고등학교. 시간 차는 있었지만 한 사람도 낙오하지 않고 일주를 마쳤다. 자전거를 세워두기가 무섭게 이들은 길바닥에 그대로 주저앉았다. 무릎이나 팔꿈치 곳곳은 상처투성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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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부금은 1200만원이 훨씬 넘게 모였다. CFC 팀원들은 이 돈으로 휴대용 정수 필터를 사 물이 필요한 개발도상국 가정에 기부하기로 했다. 먼저 올해 10월 강씨가 직접 한국컴패션과 함께 인도네시아에 물품을 전달할 계획이다. 강씨는 “자전거를 타는 내내 심장이 두근거렸다. 아이들을 도우며 내 몸은 건강해지고 마음도 풍성해졌다”고 말했다.

물이 부족한 지구 : 세계보건기구(WHO)에 따르면 전 세계 인구 가운데 6억 6300만 명은 마실 물이 부족해 고통받고 있다. 특히 사하라 사막 이남 아프리카에 위치한 나라 대부분에서 국민 절반 이상이 물 부족에 시달리고 있다. 콜레라와 장티푸스 등 수인성 전염병으로 전 세계에서 한 해에 약 350만 명이 사망한다. 어린이들은 15초마다 한 명씩 목숨을 잃는다.

제주=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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