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줄 풀고 죄는 것도 절도 있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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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강물은 너무 줄어도 안 좋고 그렇다고 범람할 정도로 넘쳐서도 안된다.
주변 유역에 필요한 만큼의 물을 공급할 수 있는 알맞은 수준을 유지하면서 한결같이 흐르는 것이 바람직하다.
요즈음 금융당국의 통화운영을 지켜보느라면 홍수와 가뭄이 교차되는 강물을 연상케 한다.
제 경제활동을 연결, 재생산을 가능케 해주는 통화는 곧잘 사람 몸 속의 피에 비유된다.
인체내 혈관을 흐르고 있는 피가 어떤 때는 부쩍 늘었다가 어떤 때는 갑자기 줄어드는 상태를 생각해 보라.
고혈압 아니면 빈현증으로 인체는 이내 건강을 잃어버리고 말 것이다.
정부는 지난 3월 하순부터 은행의 대출창구를 바짝 죄기 시작하더니 요즘엔 통화안정 증권과 재정증권을 대량 발행, 적극적인 환수에 나섰다.
그뿐 아니라 연거푸 은행들로 하여금 기업의 예·적금과 대출을 상계처리, 통화계수를 줄이느라 애를 쓰고 있다.
돌연한 통화 긴축여파로 지난주엔 하룻새 종합 주가 지수가 9·16포인트나 폭락, 증시주변을 흉흉하게 만들기도 했다.
그날의 주가폭락은 정국과 관련된 악성루머의 영향을 받은 것이긴 해도 갑작스런 금융긴축이 주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던 것은 사실이다.
통화당국은 뒤늦게 인플레이션 경계신호를 읽고서는 부랴부랴 앞뒤 안 가리는 환수 정책으로 나선 것이다.
경계신호란 다름 아닌 넘치기 직전 만수위 상태의 시중 유동성이다.
3월 말 현재 시중의 돈과 은행예금을 합친 총통화 (M2) 증가율은 작년 같은 때에 비해 17.2%, 월평잔 기준으로는 16·2%를 기록했다.
3월 한달동안에 5천9백79억원(M2)이나 폭증, 작년 동월비 약3배나 늘었다.
이 같은 증가율은 올해 정부 가정한 총 통화증가율 12∼14%를 훨씬 앞지르는 것이다.
특히 통제하기 쉽지 않은 해외 부문에서 3월 한달 새 1천8백27억원이나 살포된 사실이 통화 당국자들에겐 비상벨을 울린 셈이다.
작년까지만 해도 해외부문은 국제수지의 만성적인 적자로 통화를 크게 환수하는 역할을 해왔기 때문에 통화운영에 대해선 적지 않은 여유를 주어왔었다.
그러던 것이 특히 3월 이후 국제 원유 값의 하락 등 이른바 3저 현상에 힘입어 경상수지가 흑자로 반전됨에 따라 사정은 달라졌다.
통화환수에서 살포 쪽으로 바뀌었다. 별다른 상황변화가 없는 한 연말까지 해외부문에서 7천억∼8천억 원의 통화증발을 초래할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여기에다 작년 하반기이후 수출산업설비금융·중소기업지원자금·부품 및 소재산업 금융 등 정부가 무제한 공급하겠다고 약속한 정책금융이 대량 방출 되어야할 판이다.
그뿐인가. 해외건설업체 등 각 은행이 안고있는 대형 부실기업의 정리지원 자금으로 얼마가 나가야 될지 모르는 형편이다.
시중 유동성의 만수위 상태에서 이렇듯 통화공급요인이 산적해 있으므로 정부가 통화조절을 위한 환수책을 쓰는 것은 나무랄 수가 없다.
그러나 문제는 통화 수속을 하는 방법과 그 동안 절도 없이 공급한 방만함이다.
작년 3∼4월까지도 「안정적 호황국면」임을 @강변하면서 긴축정책으로 일관했던 정부는 어느 순간 갑자기 태도를 바꾸어 돈을 마구 풀기 시작했다.
작년5월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84년6월부터 85년3월까지 월별 전년동기 비 총통화 증가율은 6∼9%선이다가 85년 6월 이후는 12%선을 껑충 넘어섰다.
통화 정책당국은 총 통화증가와 물가와는 상관관계가 없다면서 시중금리가 떨어지고 단자회사들이 세일에 나실 정도로 신나게 돈을 풀었다.
당국은 통화가 늘더라도 곧 저축으로 흡수돼 그것이 총 통화증가로 반영되는 것이기 때문에 물가엔 걱정이 없다는 주장을 폈다.
통화의 유통속도가 떨어진 만큼 실질적인 통화량은 줄어든 것이고 그런 현상은 바람직하다면서.
물론 그 논리에도 일리는 있다. 이상 고금리 덕분에 투자대상을 찾지 못하는 여유자금이 금융자산쪽으로 몰려 저축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저축성예금의 많은 부분이 요구 불과 저축예금의 중간형태인 자유 저축예금이란 사실, 그리고 증권시장이 불붙자 금방 나타난 요구불예금으로의 대이동현상의 배경을 따져보아야 한다.
저축예금이라고 하지만 언제 투기자금으로 옮겨갈지 모를 대기성 자금이 상당 부분이라는 점이다.
그러한 사정을 정부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다른 나라에서는 올들어 2∼3차례 돌아가며 금리를 인하하고 있는데 유독 우리나라만 손을 대지 못하고 있는 아이러니를 빚고 있는 것이다.
금리가 가장 중요한 경제정책수단의 하나라면 내릴 때 내리고 올릴 때 올려서 매개 변수기능을 제대로 살려가야 하는데 우리는 그것조차도 못하고 있다.
사채시장이 파장을 보이고 시중금리가 하락할 때 공금리 인하를 했어야 했는데 또 한번 실기를 한 꼴이다.
정부가 절도 없이 돈을 푼 그 동안의 방만함 못지 않게 이번 통화 수속에서 보인 정책의 미숙함도 지적 받아 마땅하다.
강도 높은 통화환수를 단행할 때는 미리 예고를 해서 기업과 가계 등 자금 수요자들로 하여금 미리 대비하도록 하는 것이 순리다.
갑자기 죄니까 도처에서 비명과 당혹이 나올 수밖에 없지 않은가.
해외부문에서 터질 양상이면 해외부문에서 조정·해결하는 것도 생각해야 한다.
약6억 달러의 경상수지 흑자전망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는 짊어진 외채의 원리금상환을 위해 올해 57억 달러의 외자를 꾸어오는 것으로 계획이 짜여져 있다.
예상보다 경상수지에서 흑자가 더 생기게되면 그만큼 덜 꾸어오면 해외부문에서의 통화교란은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계획의 경직적 운영과 타이밍을 놓치는 (실기) 우가 그 동안 정책담당자들의 거듭된 실수로 지적된 사항이다.
지난 77∼78년 중동경기 때 돈 관리를 잘못해 정제를 망쳤던 쓰라린 경험을 되살려 절도 있는 통화운영을 하는 지혜를 발휘해야 할때다. 【이제훈<제2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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