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구영 회고록 「실패한 도전」2부 <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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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사후 공개"조건… 전공화당의장의 정치비화 녹음중계
제2부를 연재하면서
공화당 초대총재였던 정구영씨의 회고 「실패한 도전」 제2부를 연재한다. 정씨는 3선개헌 저지에 실패하고 사실상 정치일선에서 물러난 후인 72년이래 2차례에 걸쳐 중앙일보에 그의 생애를 되돌아보는 회고의 말을 남겼다. 그는 중앙일보에 그가 부닥쳤던 정치비화를 남기면서 녹음은 사후 적절한 시기에 보도해 줄 것을 당부했었다. 정구영씨는 정치보다는 변호사로 생애의 대부분을 보냈다. 그렇지만 우리가 그를 기억하는 것은 짧은 정치생애며 그의 녹음역시 자신의 정치 생애를 담았다.
정씨는 63년부터 74년까지 11년간 공화당 당적을 지녔지만 그의 당내활동은 박대통령이 3선개헌을 실현해 장기집권의 길에 들어선 71년 사실상 끝이 났다. 정씨는 그 기간 공화당 총재-당의장-총재상의역을 맡았다. 그의 자리는 권력의 중심부는 아니었지만 그는 당내 중심세력의 정신적 지주로서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는 공화당을 민주정당으로 가꾸고 정당정치를 정착시키기 위해 집권세력안에서 싸웠다. 녹음의 많은 부분은 그의 고독했던 당내 투쟁을 닫고 있다. 더우기 그가 털어놓는 박대통령과의 중요문제에 대한 대화에서 우리는 한 노정객의 민주정치에 대한 소망과 열정을 읽을 수 있다.
84년6월부터 약2개월 연재된 제1부는 한일협정 파동의 한복판에서 정씨가 다시 당의장을 맡게되는 직전까지를 담았다. 군정주체와 재야진영의 대극을 이루는 정치 구상, 군정연장 선언을 거두어 들이도록 하는 활동, 최고희의의 공화당 해체압력, 박정희 최고회의 의장의 대통령후보 수락과정, 제3공화국 출범때의 집권세력 재편성, 그리고 제3공화국 초기부터 안팎에서 밀어닥치는 공화당의 시련을 담았다. 제1부 첫 회는 66년 가을 정씨가 박대통령에게 3선개헌의 유혹을 경계하도록 사전에 경고한 대목에서 시작했었다. 3선개헌 움직임을 2년이나 앞서 예견하고 경고했던데서 우리는 정씨의 정치적 안목을 볼수 있었다.
최근 몇년사이 단편적이기는 하지만 공화당의 통치비화가 더러 소개되었다. 따라서 2부는 배경설명은 최소선으로 줄이고 정씨의 녹음을 그대로 옮기기로 한다.
공화당의 주역 김종필이 두번째 자의반 타의반의 외유에 내몰린 64년 6·3사태때의 좌절은 공화당 정권의 권력판도를 바꿔놓는 서막이 되었다. 그는 1년반의 공백을 거쳐 65년말 공화당 당의장 자리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그 자리는 1년반전의 자리와는 달랐다. 공화당을 만들던때의 김종필의 이상은 빛이 바래져 있었다. 당의 요직인 정책위의장·재 경위원장은 그를 반대하던 백남억· 김성곤이 차지해 있었고 오랜 맹우였던 길재호는 당사무총장을 맡으면서 그를 등지고 있었다. 4인체제로 불리던 이들 새로운 당직자들은 대통령의 측근 실력자 이후낙 비서실장·김형욱 정보부장과 연합전선을 이루어 김종필을 포위하고 있었다. 그는 이제 영향력을 행사 할 수가 없었다. 그 만큼 두번째 정치피난길은 그에게는 깊은 상처가 되었다.
김종필은 외유에 내몰리면서 나름으로 조속한 복귀와 그가 없는 동안의 당운영에 대한 나름의 포진을 했다.JP부대는 정구영씨를 후임 당의장으로 밀어올리고 당의 주도권도 상당기간 유지했다. 그러나 김종필을 외유로 내몬 거대한 힘앞에 JP없는 JP부대는 무력할 수밖에 없었다. 김종필의 후임 당의장을 맡게되는 과정에 대한 정씨의 회고당으로 옮겨가자.
-내가 그때 당의장을 맡게 된 것은 나로선 전혀 예기치 못했던 일이야. 하필 내가 뒷자리를 맡게된 배경은 나도 몰라. 어쩌면 내가 김종필의 퇴진을 요구하는 비주류 사람들을 반대했기 때문에 김종필 계열이 나를 지지했는지는 모르겠어.
흔히 사람들은 나를 김종필계열과 가깝다고 말했지. 창당 이래 나의 정치적 판단이나 행동이 김종필계열의 주장과 같았던 때가 많았기 때문에 그 말은 터무니 없는 말은 아니야. 그렇지만 내가 당내에서 파벌의식을 갖고 문제를 판단하고 행동한 일은 결코없어.
한일회담을 둘러싸고 당내에서 반김종필운동이 일어 났을 때 나는 그것이 옳은 행동은 아니라고 주장했어. 한일교섭은 국내의 의견통합이 어려웠다. 야당은 재야 각계와 연합해 대일굴욕 외교 반대투쟁을 폈어. 학생도 여기에 호응했다. 물론 야당의 반대투쟁은 이유가 있었다. 그렇지만 부당한 대목도 있었어.
물론 공화당 정부의 교섭이 만족할 만한 것은 아니었지. 얼마간 조급해 보였고 교섭자세도 서투른 면도 있었어. 그렇지만 당시의 내외정세는 한일교섭의 강한 압력이었고 한일국교를 더이상 지체해서 이로울 게 없다고 나는 판단했어.
아뭏든 한일교섭을 반대하는 야당진영은 교섭의 주역인 김종필을 성토했어. 그것은 있음직한 일이다. 그렇지만 공화당의 내부 파쟁이 이것을 이용하는 것은 옳은 태도가 아니었어. 김종필을 반대하는 사람들은 한일회담을 추진하는 주역이고 외부로부터 공격의 표적이 되어 있으니 책임을 묻는다는 것인데 어찌 한일회담이 김종필의 책임인가. 한일회담은 넓게는 공화당 정부가 주역이고 좁게 말하면 박대통령의 책임아래 수행되는 일 아닌가. 그런데도 이른바 민간정치인 출신인 이효상·백남억·김성곤 등 비주류 사람들과 소위 주체중의 장경 순 국회부의장이 김종필의 퇴진을 요구했다. 특히 장경순은 군부·관부의 힘을 배경으로 김종필을 억압하는 일에 앞장섰어.
나는 이런 행동이 사리에 합당치 않다고 봤지만 침묵하는데도 하도 당이 시끄러워지기에 당무회의에서 내 의견을 말했어.
그때 나는 장부의장이 말하는 당의장 사퇴및 외유 두가지 요구가 이치에 맞지 않는다는것, 더우기 자신의 요구를 신문에 공표해서 파벌대결을 밖으로 드러내는 행동에 대해 나무랐지.
어쨌든 김종필의 외유가 결정된 뒤인 6월10일 사후대책을 논의하는 당무회의가 열렸어. 김종필은 외유결정만 났을 뿐 아직 떠나지는 않은 때였는데 김종필은 나오지 않고 중앙위원회 의장인 김성진박사가 당의장대행으로 당무회의를 주재했다.
그런데 이 회의에서 뜻밖에도 만장일치로 후임 당의장에 나를 천거해. 아마 자기네끼리는 사전에 의논이 되었던 모양인데 나는 전연 몰랐어. 갑작스런 일이지. 나는 일어나서 정치의 이면을 모르는 나로서는 당의장 자리를 감당 할 수 없다, 내가 공화당 창당에 참여한 것은 잠시 협조한다는 의미였는데 여기까지 왔다, 내가 국회의원이 된 것 도 내 본 뜻과는 다르다, 그런 얘기를 했다. 그랬는데 이사람들은 만장일치라고 하면서 당무회의 대표로 김룡태·민병권·조시형 세사람이 창와대로 가더군. 그리곤 1시간이 채 못돼 나더러 청와대로 와 달라는 전화가 왔어. 갔더니 박대통령 이나더러 당을 맡아 이끌고 갈분이 선생님밖에 없으니 수고스럽지만 당의장서리를 수락해야 겠오 하는거야.
나는 당무회의에서 그런 얘기를 듣고 불과 1시간 미만이지만 심각하게 생각을 해봤지. 임시니까 당의 체면을 유지하기 위해서 창당때 임시로 총재를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수락 할것이냐, 아니면 거부할 것이냐를 생각했는데 좌우간 성의를 다해서 현실정치에 참여해 보는것이 옳다는 판단을 했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청와대에서 연락이 있었고 대통령도 같은 권유를 하기에 대통령한테 내심정[창당에 참여한 심정]을 얘기했어. 그리고 내가 이 난국을 극복하는 일에 얼마만큼 이바지 할 수 있을지 걱정된다, 제일 급한 문제가 한일회담 추진인데 이것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판단인데 반대세력이 총력투쟁으로 부닥쳐오고 있으니 어려운 난국이다, 김종필 당의장이 물러난 이유는 물론 이면에는 당내의 알력이 있지만 형식상으로는 한일회담을 굴욕외교로 규정한 반대세력 때문이 아니냐, 나의 능력에 미흡함이 많지만 성의를 다하겠다, 그렇지만 정치자금이 나에게는 제일 큰 문제다, 그 문제에 대해서는 나대로의 생각이있는데 대통령과 의견이 맞을지 안맞을지 이 자리에서 논의할 일은 못되지만 심각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내일이라도 대통령께 말씀 올리기로 하고 우선 잠정적으로 수락을 하겠읍니다, 그러나 서서히 적당한 인물이 나오거든 교체해 주십시오, 이 두가지조건-정치자금에 관해서 내 의견을 들어달라는 면과 잠정적이라는것-이 두가지를 조건으로 수락을 하겠읍니다 라고 말하고 청와대를 나왔어요.
당 사무실에 돌아왔더니 당무위원들끼리 여러 얘기를 했는데 두갈래 였다는 거야. 대단히좋은 태도라고 하는 이도 있었지만 더러는 융통성 없는 꾜장꼬장한 성격이 현실정치에 적응이 되겠느냐고 의구하는 사람도 있었다는 게야.
6월10일 당의장 서리에 임명되고 이틀 뒤 에. 청와대에 들어 갔어. 정치자금 문제를 얘기하기 위해 내가 면회를 요청했어. 가만히 정세를 보니까 정치자금을 청와대 비서실에서 다루고 있단 말이야. 이건 당시 공공연한 비밀이야. 공화당만해도 당시 사무국 급료 등 매월 막대한 경비가 지출되었는데 이것도 이후낙 비서실장한테서 타 써야 돼. 구체적인건 비밀이니까 내가 얘기하자는 않겠지만 좌우간 비서실장이 청와대에 앉아서 정치자금을 조달 하는거야. 그래 이 폐단을 없애야겠다는 생각에서 들어갔어.
-정치자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나는 30여년을 법조계 생활을 했기 때문에 모든 것을 법에 의한 통치라는 면에서 .내다보고 있습니다. 특히 민주국가에서는 법치주의라는 것이 절대적 요건이라고 보는데 정치자금을 염출한다는 것이 우리 형편에서는 대단히 어렵습니다. 우리 나라가 영국이나 일본정도 만큼이라도 문화수준이 높고 민족자본이 육성되어 있다면 정치 자금에 대한 그런 대로의 길이 있겠지만 이처럼 정치적으로도 후진성이 두드러지고 민족자본도 제로상태에선 정치자금 조달이 어렵습니다. 김종필씨가 궁지에 몰린 소위 4대 의혹사건이란 것도 역시 어려운 정치자금 탓이라고 봅니다….여기에 대해서 내가 대통령께 먼저 진언 드리고 싶은 것은 청와대에서 정치자금을 상관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뭐 그런것이 있나요.
-항간에서는 내각은 껍데기 내각이고 알짜 내각은 청와대에 있다, 이후낙 비서실장은 부통령이라 볼 수 있고 실제에 있어 국무총리 대행이라 볼 수 있고 재무장관이라 볼 수 있고 상공장관이라고 볼 수 있다, 그분이 이것을 다 처리한다, 인사에 관한 것 자금에 관한 것 이 두 가지는 이후낙 비서실장을 통하지 않고는 아무 것도 안된다, 정부 장관들은 로봇다, 이실장의 쪽지 한장이 들어가면 그것이 곧 지상명령으로 통한다, 이런말이 벌써 항간에 유포 되어있습니다. 작년 12월에 제3공화국이 출범해서 불과 반년이 좀 지난 사이 이런 말이 공공연하게 시중에 유포되어 있는 것은 우려 할 현실입니다. 청와대에서 정치자금을 만든다는 것, 후진국에서 정치자금을 조달하는데 집권권력이 개입 한다는 것, 이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법률을 자꾸 내세워 안됐지만 현행 법률에 증수회에 관한 규정이 있읍니다. 이것이 정치자금과 결부되어 적용되어야 한다고 할 때 대단히 위험한 요소가 있읍니다. 정치자금이 필요 악이라 인정한다 할지라도 최악의 경우 당에서는 당의장선, 정부에서는 국무총리선까지에서 그쳐야지 그것이 청와대에 파급된다면 국가안위에 중대한 문제가 생깁니다. 그렇잖아도 야당에서는 한일회담에도 자금과 관련한 의혹이 있다고 주장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 비서실장이 제아무리 뭐라 해도 그것은 대통령의 대리로 보게됩니다. 이후낙군으로 하여금 그 행동을 못하게 하면 좋겠습니다. 비서실장을 바꾸는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생각해 보겠습니다. 좋은 의견이 신데 잘 생각해서 처리하겠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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