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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전증 환자가 어떻게 운전대 잡았나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난달 31일 부산 해운대구 해운대문화회관 교차로에서 발생한 7중 추돌사고의 가해차량 운전자 김모(53)씨가 뇌전증을 앓았던 것으로 확인되면서 허술한 운전면허 관리가 도마에 올랐다.

17명의 사상자를 낸 부산 해운대 광란의 질주 사건의 가해 차량 운전자가 순간적으로 발작을 일으키는 뇌전증(간질)을 앓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사건을 조사하는 해운대경찰서는 가해 차량 운전자 김씨가 뇌전증 진단을 받고 평소 약을 복용해온 것으로 확인됐다고 1일 밝혔다.

하지만 뇌전증 환자는 현행법상 운전면허 취득이 불가능하다. 경찰은 김씨가 치료를 받은 울산의 한 병원 신경과 담당 의사를 상대로 확인할 결과 김씨가 2015년 9월 뇌 질환의 일종인 뇌전증 진단을 받았고 같은 해 11월부터 매일 2번씩 약을 먹었다고 설명했다.

간질로 알려진 뇌전증은 하루라도 약을 먹지 않으면 경련을 일으키거나 순간적으로 의식을 잃는 만성적 신경계 질환으로 운전면허 결격 사유다. 운전 중 정신을 잃으면 자칫 대형 교통사고를 유발할 수 있어 뇌전증 환자는 운전면허를 취득·갱신해서는 안 된다. 환자 10명 가운데 4명이 두통에 시달리며 심한 경우 우울한 감정에 빠지거나 자살로 이어질 수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1993년 2종 보통면허를 취득 후 2008년 1종 보통면허로 변경했다. 이어 올해 7월 면허갱신을 위한 적성검사까지 무난히 통과했다. 면허시험장 적성검사 당시 김씨는 시력, 청력, 팔·다리 운동 등 간단한 신체검사만 했을 뿐, 면허 결격 사유인 뇌전증에 대한 검증은 없었다. 이 때문에 뇌전증을 앓고 있는 김씨는 운전면허 취득이 불가능했지만 차를 몰고 다닐 수 있었다.

운전면허 검증체계의 허술한 구멍 때문에 3명이 숨지고 14명의 중경상자가 발생한 대형 참사가 발생했다는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김씨는 과거에도 보행로로 차량을 운전하는 등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사고를 내 뇌전증이 의심된다고 경찰은 밝혔다. 김씨는 뇌 질환 이외에도 여러 만성질환을 앓고 있다. 10년 전부터 당뇨병을 앓아 왔고 지난해 병원에서 심장 혈관이 좁아 확장하는 시술을 받기도 했다.

현행 운전면허시험은 정신질환자나 뇌전증 환자는 응시할 수 없도록 규정하고 있다. 경찰에 따르면 뇌전증 환자와 같이 정신질환으로 인한 운전부적격자는 보건복지부에서 경찰에 관련 내용을 전달하고, 경찰은 이를 교통공단에 다시 전달, 수시 적성검사를 하도록 돼 있다. 하지만, 면허시험 응시자가 병력을 스스로 밝히지 않는 이상 면허취득을 제한할 방법이 없는 상태다. 면허취득 전 시행하는 신체검사도 적성검사 때와 마찬가지로 간단한 테스트만 통과하면 된다.

보건복지부나 지자체, 군대, 국민연금공단, 근로복지공단 등의 기관은 정신질환자, 알코올·마약 중독자 등 운전면허 결격 사유 해당자 정보를 도로교통공단에 보네 운전면허 유지 여부를 가리는 수시 적성검사를 하지만 이 역시도 형식적이다. 특히 정신질환자는 입원 기간이 6개월 이상이어야 도로교통공단에 통보되고 뇌전증 환자는 아예 통보대상에서 빠져 있다.

최재원 도로교통공단 부산지부 교수는 “뇌전증 운전자는 도로를 달리는 시한폭탄인데 이번 참사도 허술한 운전면허 제도로 인한 예견된 사고였다”며 “독일처럼 개인 병력을 면허발급기관과 병원이 공유하는 시스템을 구축해 결격 사유에 해당하면 면허를 일단 보류하고 정밀감정해 부적격자를 가려내야 한다”고 말했다.

앞서 31일 오후 5시18분쯤 부산시 해운대구 좌1동 해운대문화회관 사거리에서 김모(53)씨가 몰던 푸조 차량이 신호대기 중이던 액센트 차량을 뒤에서 들이받았다. 이후 푸조 차량은 달리던 속도 때문에 왼쪽 측면으로 방향이 틀어져 진행하다 건널목을 건너던 보행자들을 덮쳤고 이어 사거리를 통과하던 다른 차량 5대와 추돌한 뒤 멈췄다.

이 사도로 횡단보도를 건너던 피서객 홍모(44·여·경기도 거주)씨와 아들 하모(18)군, 부산 시내 모 중학생 김모(15)군 등 3명이 숨지고 14명이 다쳤다. 10여 년 전부터 혼자 아들을 키웠던 홍씨는 이날 오랜만에 아들과 부산으로 여름휴가를 왔다 이같은 참변을 당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김군도 부모가 지병으로 정부로부터 기초생활수급 지원을 받았지만 늘 씩씩하고 밝았던 것으로 전해져 주위를 더욱 안타깝게 했다.

배재성 기자 hongdoy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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