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부상이 바뀌고 있다>"집안일은 부부가 같이 한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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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일요일이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세탁기 돌리는 일은 내가 맡습니다. 반자동이라 물의 낭비를 막기 위해선 지켜보고 섰다가 적당한 때 물을 바꿔줘야 하는데 그 일을 하는 것이지요. 라면 끓이는 솜씨는 아내보다 오히려 내가 나아요』결혼생활 15년째인 중견회사원 김해철씨(41)의 얘기.
『집사람이 혼자손에 살림하랴, 아이 키우랴 쩔쩔매니까 자연히 집에 오면 도와주게 됩니다. 아파트 베란다 청소, 김치통 닦기는 항상 내차지고 침대정리도 내가 해요. 아기 기저귀도 갈아주고 외출 때도 아이는 내가 맡습니다』결혼생활 3년째인 은행원 남인기씨(30)의 경우다.
사실상 요즈음은 일요일이면 주택가나 아파트 단지의 슈퍼마키트 등에서 바구니를 들고 아내와 함께 쇼핑하는 남편, 유모차를 밀며 산책하는 젊은 아빠들을 흔히 볼 수 있다.
예전처럼 가정부를 둘 수 없는 형편에선 필연적 현상인 듯.
이러한 현상을 정세화교수(이대·여성문제연구소장)는 『이제 집안일은 아내차지. 바깥일은 남편 몫이라는 가정에서의 부부의 전통적인 역할구분에 변화가 오고 있다는 확실한 한 증거』라고 얘기한다. 특히 20∼30대의 젊은 남편일수록, 더욱 많이 교육을 받은 남편일수록 아내의 가사부담을 덜어주는데 적극적인 것 같다고 정교수는 말한다. 가전제품의 폭넓은 보급 등으로 가사노동의 양은 크게 줄었지만 시대변화에 따른 새로운 역할 또한 크게 늘었다는 것이 주부들의 얘기다. 『동회에 다니며 주민등록증 떼는 일, 은행에 다니고 세금 내는 일, 아이들 학교관계의 일, 남편과 아이의 뒤치다꺼리가 끝이 없어요. 남편이 바쁘니까 시가·친정 할 것 없이 친척경조사 등에 참석하는 일까지가 모두 제몫이예요』결혼생활 10년째인 가정주부 한순미씨(34·서울 마포구서교동)는 말한다.
전통적인 아내역할에 변화가 오고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가사의 대부분은 아내 차지고 가사노동의 양이 준 대신 대사회적 접촉이 늘어 종전과는 내용이 바뀐, 여전히 빛 안나는 일로 바쁘다는 것이다.
현대사회에서 주부의 주요역할은 『가족건강 지키기와 집안분위기를 안락하게 만들기』라고 조혜정교수(연세대·사회학)는 얘기한다. 가정을 「경쟁적이고 비인간적인 일터로부터의 도피처이자, 휴식처」로 생각하는 남편을 위무 하는 등의 감정적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또 『남편의 출세와 자녀의 학업성취를 통해 가족집단의 지위를 상승시키는 일 역시 오늘날의 중요한 주부역할로 부상했다』고 조교수는 얘기한다.
이러한 사회분위기는 적지 않은 주부들로 하여금 남편이 출세 못하고 자녀의 학업성적이 부진한 것은 전적으로 자신의 책임인 것 같아 갈등을 느끼게 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고 전문가들은 진단한다.
『아내들의 사교활동이 상당히 중요해진 요즈음인 것 같습니다. 남편의 승진을 위해서는 남편상사 부인과의 교제가 필수적이고 그 집 경조사를 챙겨야 해요. 따라서 아내의 학벌·집안·교제술이 그 어느 때 보다 중요하고 남편들도 은근히 그 덕을 보고 싶어하는 세상인 것 갈아요』가정주부 김혜난씨(42·서울 용산구 갈월동)의 한탄이다.
85년 서울시내 아파트주부 5백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한 의식조사(동국대 조은교수)에 의하면 실제로 주부들이 가장 즐겁고 보람있는 일로 꼽는 세가지 내용은 자녀양육·남편 시중들기·집안 꾸미기였다.
하기 싫은 귀찮은 일로 꼽은 세가지 내용은 집안청소와 세탁·식사준비·손님접대였다. 가사를 「여성의 일」로 생각하느니 만큼 어쩔 수 없이 하지만 되도록 이면 줄이고 싶은 일이라는 것이다.
남편의 역할에도 변화가 오고 있다. 산업사회에서의 남편의 역할은 전통적인 「밥벌이를 하는 일」등 외에도 가족들을 감정적으로 토닥거리고 용기를 주는 일, 주말이나 휴가를 즐겁게 보내게 하는 일 등이라고 사회학자들은 지적한다.
『이제 우리도 그런 단계에 들어선 것 같습니다. 핵가족에서는 아내와 자녀들이 남편에 거는 기대가 큰 만큼 과중한 직장 일과 집안에서의 역할에 어떻게 적절히 시간과 에너지를 배분하느냐가 중요해진 것 같습니다』고 최신덕교수(이대·사회학)는 얘기한다.
이밖에 요즘 부부간의 역할에서 중요시되는 것이 성적 조화.
85년 서울의 중상층 부부 약7백쌍을 대상으로 실시된 한 조사(이대부속병원정신신경과 이근후박사)에 의하면 조사대상의 80%가 「결혼에 있어서 성은 중요하다」고 답했다.
이런 현상이 바람직하기는 하나 끝없이 「아름다움과 젊음」을 강조하고 아내도 성적으로 매력 있는 상대여야 한다는 일부 사회분위기는 순진한(?) 주부들을 왜곡시키고 터무니없는 열등감을 갖게 한다고 전문가들은 얘기한다.
「지나친 정보의 범람, 있는 사실보다 부풀려진 허상」은 문제가 된다는 이시형씨(고려병원 정신신경과 전문의)의 얘기다.

<알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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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낼 곳=중앙일보 편집국 문화부 (751)5315 <박금옥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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