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새로운 금융실험…영구채 발행 급부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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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또 하나의 금융 실험을 할 기미다. 영구채(Perpetual Bond) 발행이다. 이는 일본 정부가 원금 상환 때신 정기적으로 이자만을 주는 채권을 찍어내 자금을 조달하겠다는 뜻이다. 언뜻 봉이 김선달의 대동강 팔아먹기를 떠올리게 하는 머니게임이다.

벤 버냉키 전 미국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이 이 방법을 권했다. 상대는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의 경제정책 참모들이었다. 블룸버그 통신에 따르면 버냉키는 이달 13일 미국 워싱턴에서 아베 참모들을 만나 "영구채가 일본 재정 문제를 해결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일본의 국가부채는 국내총생산(GDP)의 2배 이상이다. 일본 정부는 채권 만기가 돌아올 때마다 새로운 채권을 찍어 조달한 자금으로 돌려막고 있다. 그나마 일본 정부의 돌려막기가 큰 탈 없이 이뤄지고 있는 데는 일본은행(BOJ)의 양적완화(QE)가 한 몫하고 있다. 이런 때 일본이 영구채를 발행한다면 돌려막기 부담이 줄어든다. 이자만 또박또박 주면 되기 때문이다.

버냉키만 영구채를 제안한 게 아니다. 전 BOJ 기획국장을 지낸 이와무라 미츠루 와세다대 교수도 "BOJ가 QE를 중단하면 국채 금리가 올라 재정 신뢰도가 무너질 수 있다"며 "그런 상황을 대비해 영구채를 발행해야 한다"고 조언했다.

영구채는 17~18세기 영국과 네덜란드가 재정난을 해결하기 위해 발행했다. 미국 예일대학 기금펀드가 17세기 후반에 발행한 네덜란드 영구채를 지금도 보유하고 있을 정도다. 이 채권이 실제 발행된다면 일본은 QE에 이어 영구채까지 금융 역사의 저편에 유폐됐던 또 하나의 비상 수단을 부활시키는 셈이다.

영구채라고 해서 무조건 원금 상환이 안 되는 건 아니다. 재정형편이 나아지면 발행국이 시장에서 영구채를 사들이는 방식으로 갚기도 한다.

영구채는 아베 총리에게 매력적인 카드다. 그는 최근 3조5000억 엔이 넘는 경기부양책을 발표했다. 핵심은 어떻게 자금을 조달할 것인가다. 국채를 찍어내는 것 외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아베가 영구채를 찍어내고 BOJ가 상당 부분을 사준다면 일본 정부의 빚 부담을 빠르게 늘리지 않은 채 재정지출을 확대할 수 있다.

강남규 기자 dismal@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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