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8년까지 개헌 논의 유보하자는 것|전 대통령의 국정 연설에 담긴 뜻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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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전두환 대통령은 올해 국정 연설을 통해 평화적 정권교체에 대한 강력한 의지를 재천명하고 초미의 관심사가 되고 있는 개헌 논의를 89년 이후로 유보하자는 주목할 만한 소신을 제시했다.
그 동안 개헌 문제에 대한 대통령의 언급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번 국정 연설에서와 같이 정면에서 논리적으로 소신을 분명하게 밝힌 적은 없었다.
한마디로 전 대통령은 개헌 논의는 현행 헌법에 의한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고 88올림픽을 성공적으로 마친 89년 이후에 가서 양대 행사를 성취한 바탕 위에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국론 분열과 혼란을 초래할 수도 있는 개헌 논의를 일단 유보하고 88년까지의 당면 과제인 평화적 정권교체의 전통 확립, 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국력을 총 집중하자는 대 국민 호소이기도 하다.
특히 주목되는 것은 이제까지 부정적 시선으로만 보아 오던 대통령 직선제 주장에 대해서도 그 논리와 근거를 인정하고 다만 지난 우리의 헌정사를 통한 체험에서 직선제가 한번도 좋은 결실을 맺지 못했다는 점에서 또다시 그런 시행착오를 되풀이하지 말자는 새로운 접근 방법을 시도한 점이다.
전 대통령은 『대통령 직선제가 결코 나쁜 제도가 아니며 그것도 현행 제도와 같이 나름대로의 논리와 근거를 가진 제도』라고 언급함으로써 정치제도로서의 직선제가 갖는 이론적 타당성은 인정하면서도 직선제가 우리의 헌정사를 통해 단 한번도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지 못했고 많은 외국 예도 그러하다는 비판 논리를 제시했다. 전 대통령은 아울러 평화적 정권교체를 확실하게 보장하고 있는 제도는 현행 헌법임을 강조함으로써 강력한 호헌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
이는 평화적 정권교체라는 고지를 불과 2년 앞둔 현시점에서는 지난 5년간 지켜 온 현행 헌법 제도로 성취하는 것이 가장 안전하고도 쉬운 길이며 새삼 과거에 실패를 체험한바 있는 직선제를 굳이 들고 나와 국력을 소모할 필요가 없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전 대통령의 임기가 88년 2월말에 끝난다는 점을 생각하면 「89년 논의」는 다음 대통령 대에 가서 개헌 논의를 하자는 뜻이 된다. 그리고 그때 가서도 직선제는 배제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전 대통령의 생각이라 볼 수 있다.
이번 국정 연설을 통한 대통령의 개헌 문제 언급은 개헌 논의의 확산이나 증폭이 아니라 89년까지 덮어두자는 뜻이며 동시에 그때 가서 논의를 하더라도 현행 헌법으로 이룩된 평화적 정권교체의 「선례」를 계속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는 뜻까지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전 대통령은 이와 관련, 『평화적 정권교체를 이룩하기 의해서는 국력을 모으는 「큰 정치」를 지향해야 한다』며 『모든 정당이나 정치인들은 국민들에게 「저 사람이라면」 또는 「저 정당이라면」 안심하고 다음 정부를 맡겨도 좋겠다는 믿음을 심어 주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는 과거 전 대통령이 평화적 정권 이양을 위한 집권자의 의지와 그것을 가능케 할 정치적·사회적 안정을 강조했던 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정부를 인수받을 수 있는 정당과 정치인의 자세와 노력을 촉구한 것으로 주목되는 대목이다.
전 대통령은 『의회주의의 기본이 의회에서 대화와 토론을 통해 다양한 민의를 통합하는데 있다』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이 스스로 법을 어기고 의회를 외면하면서 비합법적인 수단을 동원한다면 국민의 한사람으로서 스스로 직분을 포기하는 부끄러운 일』이라고 지적했는데 이는 최근에 있었던 의사당 사태를 개탄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러면서 전 대통령은 『정치인이 끝내 국민적 기대에 부응하지 못할 경우 국민들은 그들에게 대표권을 맡겨 두고 있는 것을 매우 불안하게 생각할 것이며 계속 본분을 외면할 때는 어떤 형태로든 국민적 심판이 준엄해질 것임을 각오하지 않으면 안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 대목은 의사당 사태를 포함한 최근의 정국에 대한 경고로 보이는데 구체적으로 「국민적 심판」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단정하기 어려우나 전 대통령의 심중에 어떤 결의가 있음을 느끼게 한다.
전 대통령이 특히 법질서를 파괴하고 사회 안정을 저해하는 사회적 범법 행위를 단호하게 규제할 것을 밝히면서 다수 국민들이 더 이상 속으로만 걱정할 것이 아니라 법과 질서의 보루로서 반사회적인 일체의 동태에 대해 강력한 훈계와 제동 역할을 해야 할 때라고 강조한 점도 주목되는 대목이다.
이는 있을지도 모를 야권의 불법적인 장외 운동·학생 데모 등에 대해 단호한 대처 의지를 밝히는 한편으로 국민들도 적극 호응해 달라는 요청으로 보인다.
특히 『국민이 반사회적 범법에 대한 강력한 저지 역할에 나서는 것은 국가와 사회 전반의 안전판을 가동하는 것』이라고 강조해 전환기에 대처하는 국민들의 적극적인 참여와 역할을 기대한 것으로 보인다.
전 대통령은 이번 연설에서 흔히 대통령의 임기 말기에 나타날 수 있는 사회 기강의 해이나 부정부패의 만연 등 역작용에 대한 경계를 게을리 하지 않을 것임을 분명히 하고 있다.
『본인은 임기를 생각해서 대통령에게 부여된 소정의 임무를 조금이라도 소홀히 할 생각이 없다』는 대목이나 『시작도 중요하지만 과정과 끝맺음이야말로 더욱 중요하다는 확신에서 앞으로 남은 임기 동안 혼신의 힘을 바쳐 소임을 다할 결심』이라고 밝힌 것은 이러한 의지의 표명으로 해석된다.
특히 『사회 기강을 확립하려는 노력이 비록 인기가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본인은 이 비인기를 감수할 각오를 지니고 있다』고 밝힌 것은 국법 질서 수호의 최고 책임자로서 어떠한 법질서 파괴 행위나 사회적 혼란 조성도 좌시치 않겠다는 굳은 의지와 결의를 표명한 것으로 보인다.
대통령이 이번 연설에서 밝힌 「큰 정치」가 향후 어떤 방향으로 어떻게 전개될 지와 89년까지의 개헌 논의 유보 제의가 야권에서 과연 어떻게 수용될 수 있을지 주목된다. <고흥길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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