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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작가 김용익씨 특집 WP지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10면

재미작가 김용익씨(66)가 미국에서 새롭게 조명되고 있다. 국내에서도 김씨의 대표작『꽃신』이 무용화되어 지난해 11월 무대로 꾸며진바 있다. 최근 워싱턴 포스트지는 그와의 인터뷰기사를 특집으로 꾸몄다. 김씨의 장편 『푸른씨앗』은 74년 미국의 교육방송TV드라머로 제작되었을뿐 아니라 덴마크의 교과서에까지 소개되었다. 역시 장편 『행복의 계절』은 62년 미국의 「젊은이를 의한 추천도서 30권」에 뽑힌데 이어 서독과 영국에서도 청소년을 위한 추천도서로 선정될만큼 교육성과 문학성을 경비한 수준높은 작품으로 평가받았다.
83년에는 국제문화교류를 목적으로 한 『세계단편집』이 미국에서 간행되있는데 4편의 김씨 작품이 포함되었다.
20년 경남 충무에서 태어난 김씨는 48년 도미, 30여년동안 한국토속을 배경으로 한 30편의 단편과 4편의 장편, 2면의 단막극및 1편의 장막극을 영어로 각각 발표함으로써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버클리대학을 거쳐, 현재 피츠버그의 듀켄대학에서 문예창작론을 강의하고있다.
다음은 워싱턴 포스트지와의 인터뷰 내용.
-48년 처음 미국에 와서 겪었던 어려운 점은?
『그때는 지금처럼 제트기가 없어 오기까지 여러날이 걸렸다. 처음 도착한곳은 시카고였다. 그 도시는 한국에서 본 으스스한 갱영화로 유일하게 기억되는 곳이었다. 거리에 나왔을 때 한 사내와 부딪쳤는데 그는 갱영화의 주인공처럼 뺨에 흉터가 있었고 손을 호주머니에 푹 찌르고 있었다. 나는 오금이 저러 공항으로 줄행랑을 쳤다. 곧 방향을 바꿔 플로리다행 비행기표를 끊었다.
한 고교교사의 초대로 젝슨빌로 갔는데 그곳에서 여러사람과 대면했다. 나는 순엉터리 영어로 1시간동안 마구 지껄였다. 내말이 끝나자 사람들은 무엇에 쫓기듯 바깥으로 나가버렸다.
또한 잘 정돈된 사회체제가 줄곧 나를 괴롭혀왔다. 아직까지 자동차를 운전할줄 모르고 12년전까지 전화가, 10년전까지는 TV가 없었다』
-처음 미국에 와서 작가가 되기위안 야심을 가졌는가?
『직업적인 작가가 되려는 생각은 없었다. 단지 이 나라에서 무척 고독했기 때문에 글을 쓰게 되었을 뿐이다. 매일아침 3시간쯤 몰두했는데, 한번은 방을 같이 쓰는 룸메이트가 무얼하는지 나에게 물었다. 「책을 쓰고 있다」라고 대답하자 그는 나를 조롱했다.
그 이후부터 나는 매일아침 3시간씩 평생동안 글을 쓰고있다]
-무엇을 썼는가?
『나는 어린시절의 고향을 그리워하며, 한국어린이의 정서와 희망을 그리고 있다. 아직도 어린시절의 친구들이 가깝게 다가온다. 그들은 한국에서도 매우 가난한 집 자식들이었다.
그러나 우리는 가난속에서도 늘 웃으면서 성장했다.』
-처음 출판한 책은?
『「꽃신」 이다. 푸줏간집 아들이 꽃신 만드는 집 딸을 사랑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여생을 미국에서 보낼 예정인가?
『나는 늘 고국을 생각하며 고국에 관한 글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어디서 살든지 그건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한국인으로서 인종차별을 느껴본적이 있는가?
『적어도 글을 쓰면서 느낀 적은 없다. 글쓰는 것은 공정하다. 혹인이건, 백인이건, 황인종이건 아무 상관이 없다. 그것은 돈과 마찬가지다. 흑인의 돈이나 백인의 돈이 같듯이 이야기만 좋으면 독자들은 결코 피부색을 개의치 않는다』
-고국을 그리워하고 사랑하면서 왜 미국에서 사는가?
『나는 항상 낯선 곳을 좋아하고 낯선 사람들을 만나기를 즐긴다. 또한 한국·일본같은 조그만 나라에서의 인간관계는 너무 굳게 결속되어 있기 때문에 답답함을 느낀다. 나는 늘 자유롭고 싶다. 그러나 고국을 떠난 이후 항상 고국을 생각했다. 때때로 고향친구들은 한국음식을 보내준다. 그속에 한국땅의 정취와 고향 바닷가의 향수가 끈끈하게 배어있다.』

<인터뷰어=최연홍 콜럼비아대학 경영학교수. 시인·작가><양헌석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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