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과 문화] 마음의 냄새를 아십니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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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보통 우리는 냄새를 묘사할 때 좋다.나쁘다.향기롭다.역겹다 등의 객관적 형용사를 쓴다. 그렇지만 가끔 냄새에도 감정이 있다는 생각을 해본다. 즉 기쁜 냄새.슬픈 냄새.미운 냄새.반가운 냄새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은 물리적인 사실과는 상관없이 각자의 경험에 의해 그 냄새에 감정을 투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사랑하는 연인이 이별을 고하며 준 꽃냄새는 아무리 아름다운 향기라도 영원히 슬픈 냄새로 기억될 수 있고, 어렸을 때 콩서리하여 구워 먹다 새카맣게 타버린 콩냄새는 그리운 냄새일 수 있다.

1학기가 끝나고 방학을 맞아 제대로 정리도 못한 채 대충 짐을 싸 길을 떠났다. 비행기에 들어서자 낯익은 냄새, 그것은 바로 이별 냄새, 그리고 동시에 가슴 설레는 희망의 냄새였다.

오래 전 유학하기 위해 처음으로 비행기를 탔던 때의 두려움.슬픔, 그리고 동시에 새로운 세계에 대한 기대와 설렘…, 그 후에도 여러 번 비행기를 탔지만 언제, 어느 곳에서, 어느 비행기를 타도 그 특유의 냄새가 같은 추억을 불러일으킨다.

LA 공항에서 밖으로 나오자 미국 특유의 공기 냄새가 났다. 옅은 화장품 냄새 같기도 하고 그냥 휑하게 넓은 공간을 스치는 바람 냄새 같기도 하다. 그것은 조금은 흥분되고 또 조금은 붕뜬 느낌, 마음 한구석에 구멍이 뚫린 듯한 타향의 냄새다.

지금 나는 LA 근교의 산마리노에 있는 헌팅턴 도서관에 앉아 이 글을 쓰고 있다. 미국 문학 관련 책들을 보기 위해 고물 수동식 엘리베이터를 타고 지하서가로 들어오는 순간 코를 스치는 독특한 냄새. 무어라 형용할 수 없는, 어딘지 축축하고 매캐한 오래된 책 냄새다.

이렇게 책 냄새를 맡고 가르치는 일이 내 직분임에도 불구하고 그저 이런저런 일에 부대끼고 시달리며 얼마간 까맣게 잊고 있던 냄새다.

서가를 훑어보는데 프랜시스 톰슨이라는 영국 시인에 관한 책들이 꽂혀 있었다. 대학 다닐 때 영시개론 시간에 톰슨의 '하늘의 사냥개'라는 시를 배운 적이 있다. "나는 그로부터 도망갔다, 낮과 밤 내내 그로부터 도망갔다. 시간의 복도를 지나 내 마음의 미로를 지나, 나는 그로부터 도망갔다. 그러나 그는 늘 내 곁에 있었다." 신과 인간과의 관계를 재미있는 비유로 묘사한 이 시를 가르치며 교수님은 사람마다 독특한 마음의 냄새를 갖고 있다고 하셨다.

심통난 사람은 심통 냄새를 풍기고, 행복한 사람에게서는 기쁜 냄새가 나고, 무관심한 사람, 이기적인 사람, 모두 다 주위에 마음이 체취처럼 풍긴다고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얼마 전 어떤 TV 프로에서 진행자가 병든 아버지와 동생을 부양하기 위해 피자 배달을 하는 청년을 인터뷰했는데, 그도 비슷한 말을 했다. 진행자가 꿈이 무엇이냐고 묻자 "좋은 냄새가 나는 가정을 갖고 싶습니다"라고 답했다. "겨울에 오토바이를 타고 피자 배달을 다니면 정말 지독하게 춥습니다. 그런데 피자를 배달하기 위해 현관문을 들어서면 언제나 그 집 특유의 독특한 냄새가 있습니다. 집이 크든 작든, 비싼 가구가 있든 없든, 아늑하고 따뜻한 사랑의 냄새가 나는 집이 있는가 하면, 어딘지 냉랭하고 서먹한 냄새가 나는 집이 있습니다. 아늑한 냄새가 나는 집에서는 정말 추운 바깥으로 나오기가 싫지요. 저도 훗날 그런 가정을 꾸미고 싶습니다."

오래된 책의 향기 속에 파묻혀 앉아 새삼 나는 생각한다. 내 집의 냄새는, 아니 나의 체취는, 내 마음의 냄새는 무얼까.

장영희 서강대 교수.영문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