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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영국’이 ‘브렉시트’란 괴물을 만들었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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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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톰 와이먼
영국 에섹스대 강사

내 고향인 영국 남부의 소도시 올스퍼드(Alresford)는 한마디로 지옥이다. 영국에서 가장 살기 좋은 소도시의 하나로 손꼽히는 이곳이 지옥이라니 믿기지 않을 것이다. 빈곤이나 범죄는 찾아볼 수 없고, 일류 학군과 다양한 상점가, 고색창연한 철도역이 찾는 이를 반긴다. 중심가 집값이 100만 파운드를 쉽게 넘어가는 이유다.

영국의 EU 탈퇴 결정 속내는
뿌리 깊은 허무주의·속물의식
한 줌 기득권 지키려 고립 선택
쇄국의 대가 혹독하게 치를 것

그러나 도시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악마가 기어 다닌다. 주민들 표정부터 그렇다. 특권의식에 가득 차 높이 치켜든 코, 그 속에서 비어져 나오는 속물적 비웃음, 노인들의 멍한 눈빛, 외국인이 도시 이름을 잘못 발음하면 바로 터지는 실소….

게다가 이곳에 일단 들어오면 절대로 벗어날 수 없다는 점이 올스퍼드를 진정한 지옥으로 만든다. 우선 대중교통이 엉망이다. 자가용이 없으면 도시를 빠져나가기가 불가능하다. 더 큰 문제는 실업률 급등으로 젊은이들이 올스퍼드 아닌 다른 곳에서 직장을 구할 수 없다는 점이다. 나 역시 외지에서 겨우 일자리를 구했지만 1년에 몇 달씩은 부모님이 계신 이곳으로 돌아올 수밖에 없다. 지금 올스퍼드는 내 또래인 20대 청년들로 넘쳐난다. 모두 희망 없는 밑바닥 직업을 전전하고 있다.

퇴행과 현실도피가 창궐하는 올스퍼드는 영혼의 깊은 곳을 병들게 하는 이데올로기다. ‘올스퍼디즘’이라 불러도 되겠다. 이에 염증이 난 나는 10대 후반부터 올스퍼드에서 벗어나려고 몸부림쳤다. 그 결과 간신히 에섹스대에서 강사 자리를 얻었다. 하지만 매년 여름이 되면 올스퍼드로 돌아와야 한다. 강사 월급이 나오지 않는 방학 기간 중 월세를 감당할 수 없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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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올스퍼드 유권자 명단에 내 이름을 올리지 않았다. 그러면 정말 올스퍼드에 뿌리를 내리게 될까 봐 두려웠기 때문이다. 대신 직장이 있는 에섹스에 유권자로 등록했다. 브렉시트(영국의 EU 탈퇴) 투표도 이곳에서 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솔직히 투표장에 갈 의욕이 나지 않았다. 브렉시트는 영국의 국익에 반한다는 주장에 공감하면서도, 혹시 긍정적 효과를 가져다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안이한 마음은 지난달 16일 유럽연합(EU) 잔류를 주장하던 조 콕스 노동당 의원이 살해당하며 산산이 깨졌다. 극우파인 용의자 토머스 메어는 법정에서 “배신자에게 죽음을”이라고 외쳤다.

충격적이었다. 이번 투표가 단순히 잔류·탈퇴 여부를 결정하는 자리가 아님을 깨달았다. 이민과 인종에 대한 영국인의 입장을 결정하는 시험대였다. 보다 정확히는 “낯설고 힘들더라도 새로운 미래를 향해 나라의 문을 열 것인가? 아니면 한 줌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나라 문을 닫을 것인가?”의 문제였다. 닫아버릴 수도 있었다. 그러면 영국은 작은 울타리에 갇힌 섬나라로 전락할 것이다. 내가 어느 쪽에 투표해야 하는지 명확해졌다. 이건 올스퍼디즘에 대한 찬반 투표였다.

올스퍼디즘에 반대표를 던지기 위해 에섹스로 떠났다. 올스퍼드역에서 3시간 기차를 타고 런던을 거쳐 에섹스에 도착한 뒤 투표를 하고 돌아오면 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투표 전날 밤 뇌우가 영국 남동부를 강타했다. 이 바람에 교통체계 전반이 교란됐다. 간신히 런던에 도착했지만 에섹스로 가는 모든 기차편은 취소돼 있었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전철과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 런던 외곽의 롬퍼드로 갔다. 그곳에서 에섹스행 기차가 운행된다는 얘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롬퍼드에 도착하자 “에섹스행 기차는 무기한 지연”이란 방송이 들렸다. 허탈감 속에 투표를 포기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물론 내가 투표에 성공했더라도 결과를 뒤집지는 못했을 것이다. 탈퇴를 원하는 표가 잔류를 원하는 표보다 100만 표 넘게 많았기 때문이다.

영국인들은 세상을 축소시켜 올스퍼드식으로 살아가는 쪽을 택했다. 이제 이들은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했던 대가를 톡톡히 치르게 될 것이다. 영국은 빠르게 후퇴할 것이다. 영국에 들어와 경제와 문화를 살찌워줄 외국인들도 급감할 것이다. 영국인들이 세상을 탐험하고, 성공을 맛볼 기회도 줄어들 것이다.

영국 대중의 뇌리에 뿌리 깊이 박힌 허무주의가 브렉시트를 가져왔다. 최근에 튀어나온 허무주의가 아니다. 나는 이 허무주의와 평생을 살아왔다. 죽음을 향해 웅크리고 들어가는 올스퍼드의 허무주의다.

불경기는 올스퍼드 주민에게 중요하지 않다. 부유한 동네이기 때문이다. 진정한 올스퍼디즘에 세뇌된 사람이라면 영국의 EU 탈퇴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허무주의를 믿지 않는 내 친구들이나 유럽 대륙에서 넘어와 이곳에서 일하는 사람들에겐 악몽 중 악몽일 것이다.

이제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올스퍼드 집의 내 방 창문에서 숲을 쳐다보는 것뿐이다. 저 숲이 무성해져 올스퍼드, 아니 영국 전체의 왜소함을 덮어버리고 없애버렸으면 좋겠다. 어리석은 영국인들이 스스로에게 뒤집어씌운 쇄국의 비참한 굴레를 확 뒤집어엎었으면 좋겠다.

톰 와이먼 영국 에섹스대 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