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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68) 제84화 올림픽반세기(17) 김성집|백야의 땅 헬싱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7면

헬싱키올림픽 개막을 한달 열흘쯤 남긴 6월10일 부산 문화극장에서는 올림픽선수단 결단식겸 장행회가 열렸다. 민족의 수난속에서 국민의 눈물어린 성금으로 장도에 오르는 우리 선수단은 비장한 각오를 되새겼다.
6월12일 우리 선수단은 부산수영비행장에서 성대한 환영을 받으며 비행기를 타고 일본으로 향했다. 기차와 배편으로 출국길에 오르던 런던올림픽 당시와 비교하면 호강스런 여행이었다. 일본에서는 교포들의 환영을 받으랴, 장비 구입하랴 바쁜 일정이었다. 국내의 물자사정이 어려웠던 탓으로 선수단의 경기용구·경기복·경기화 등은 모두 일본에서 구입했다.
우리 선수단 단복은 감색 상의·회색 바지의 양복이었다. 특히 베레모 비슷한 모자를 쓴 복장이 이채로왔다. 선수단복 양복지는 역시 일본에서 교포실업인 채수인씨(선수단 연구원)가 보내준 것이었다. 일본에 머무르는 동안 우리 선수단은 종목별로 연습시설을 찾아 맹훈련을 거듭했다. 국내에서 어려운 사정으로 충분한 연습을 못했기 때문에 이를 보충하기 위한 것이었다.
일본에서는 비행기 사정으로 1진이 6월15일, 2진은 24일 각각 출발, 대북을 거쳐 홍콩에 도착했다.
홍콩에서 우리 선수단이 탄 비행기는 노르웨이 SAFE항공사의 4발기. 지난 런던올림픽 출전때 이용했던 바로 그 비행기였다.
그러나 운항코스는 약간 바뀌어 방콕·캘커타·카라치를 거친뒤 이란의 아바단을 통과해 아테네∼로마∼제네바∼함부르크∼오슬로 코스를 밟았다. 특히 서독함부르크 공항에서는 시민들로부터 열광적인 환영을 받고 어리둥절하기도 했다. 그중 손기정이 가장 인기였다.
오슬로에서는 한국전에 참전했다가 다리 불구가 돼 귀국한 청년을 만나 반가움을 나누던 기억이 난다. 이 청년은 『한국의 구두닦이가 세계 제일』이라고 칭찬했는데 이 말을 들은 우리는 씁쓸한 마음을 금할 길이 없었다.
오슬로에서 다시 스톡홀름을 거쳐 올림픽의 도시 헬싱키에 도착한 것은 6월30일, 부산을 떠난지 18일만이었다. 참가 선수단중 세번째 도착이었다. 우리 선수단은 도착 즉시 헬싱키 교외의 전몰용사 묘지를 방문, 참배했다.
한편 핀란드 「파시키비」대통령은 우리 선수단에 「문화공로상」을 주며 전쟁의 참화속에서 출전한 용기를 치하했다.
핀란드는 총인구가 4백50만명, 헬싱키는 인구 38만명의 소국·소도시였다. 이런 곳에서 세계의 젊은이들을 불러들여 올림픽을 개최한다는 사실이 부럽기만 했다. 약소민족으로 주변 강대국의 억압에 시달려온 핀란드의 역사는 우리 현실과 비슷한 점도 많아 호감이 갔다. 핀란드는 봄·여름·가을이 짧고 겨울이 6개월이나 계속된다. 올림픽이 열린 7월은 여름이었으므로 햇빛이 귀한 이 나라에서는 최고의 계절이었다.
날씨는 우리나라의 가을철과 비슷한데 특이한 것은 저녁 10시쯤 해가 지고 새벽 3시쯤이면 해가 떴다. 또 해가 진뒤 한밤중에도 소위 백야현상이라 해서 어둑어둑하기만 할뿐이었다. 이 때문에 우리 선수들은 창에 두꺼운 커튼을 드리워 「인공적인 밤」을 만들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잠을 제대로 이루지 못해 애를 먹었다. 시민들은 모두 명랑·친절했고 특히 한국 선수단에 대해서는 「마라톤의 나라」로 큰 관심을 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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