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3) - 제84회 올림픽 반세기(12) - 김성집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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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1면

올림픽에 얽힌 식민지 청년의 설움이 어찌 내 자신뿐이겠는가.
이제부터는 일장기 아래일망정 우리 국민으로 처음 참가했던 제10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1932년)과 손기정이 비극의 금메달을 땄던 제11회 베를린올림픽(1936년)을 짚고 넘어가고자 한다.
제10회 LA올림픽은 유럽을 떠나 두 번째로 신대륙 미국에서 열린 대회였다. 당시 세계는 경제 대공황의 여파로 시달리고 있었으나 미국은 사상최대의 10만 명을 수용하는 스타디움(메모리얼쿨리시암)을 건실하고 참가국 선수들의 경비를 절반이상 부담해주는 등 대국의 면모를 과시했다.
본격적인 선수촌과 텔리타이프가 가설된 프레스센터가 생긴 것도 이 대회부터였다. 선수단은 37개국 1천3백여명, 관중은 무려1백50만명의 대성황으로 국내대회를 방불케 했던 1904년 제4회 세인트루이스올림픽(12개국 6백17명)에 비견할 바가 아니었다.
일본선수단은 임원69명, 선수l백31명. 이중엔 마라톤의 김은배·권태하와 복싱의 황을수 등 3명의 대한건아가 끼어있었다.
김은배는 양정고보를 갓 졸업한 21세, 권태하는 일본 명치대에 재학중인 23세의 패기만만한 청년이었다. 양정고보 재학중 육상장거리에 주력했던 김은배는 1931년 10월 마라톤대회에 첫출전, 2시간26분57초라는 놀라운 기록으로 비공인세계신을 세웠었다.
1932년5월 일본 동경에서 벌어진 올림픽대표 선발전에서는 권태하가 1위(2시간36분49초),김은배가 2위(2시간37분56초)를 차지, 결국 3위인 일본선수 「쓰다」(율전청일낭)와 함께 일본대표로 뽑혔다. 복싱의 황을수도 최종선발전에서 일본선수를 차례로 KO로 눌러 출전권을 따냈던 그. 그러나 김이 일장기를 달았건만 일본인들은 우리선수들에게 괄시가 심했다. 대회개막(7윌30일)20일 전쯤 현지에 도착한 뒤부터 일본인 마라톤 코치 「고야마」는 「쓰다」 선수에게만 마라톤 코스를 현지답사시켰다. 「쓰다」는 콘크리트 코스에 알맞은 신발을 마련했으나 사정을 모르는 우리 선수는 서울의 흙바닥을 뛸 때 신었던 신발을 그대로 신고 훈련을 계속하다가 무릎과 허리에 이상을 가져왔다.
레이스에 참가한 김은배는 5km가 지나면서부터 계속 물을 마시며 허덕이기 시작했다. 10km쯤 지날 때는 꼴찌로 처지고 말았다.
13km쯤 지날 때였다. 연도에 나온 시민들 가운데 『김은배, 뛰어라』라는 한국말이 튀어나왔다. 바라보니 태극기를 든 교포들이 안타깝게 응원을 보내는 것이었다. 『죽으면 죽었지 기권할 수는 없다』 태극기를 본 김은배는 무서운 힘으로 달려 앞선 선수들을 따라잡기 시작했다.
반환점을 지나 권태하를 만났으나 피로에 지친 그는 먼저 가라는 신호를 보낼 뿐이었다.
골인지점 2km를 남기고 만난 언덕에서 김은배는 20여명을 물리치며 질주, 6위(2시간36분28초)로 골인했다. 권태하는 뒤이어 9위로 들어왔고 일본인 「쓰다」는 5위였다.
김은배는 일본인의 농간 탓으로 실패했다는 생각에 분통함을 참지 못해 눈물을 흘렸다. 복싱 라이트급에 출전했던 황을수는 1회전에서 독일의 「프란츠· 칼츠」와 열전을 벌였으나 아깝게 판정패했다.
우리 선수의 첫 올림픽, 도전은 이처럼 울분 속에 끝났지만 우리 선수들이 LA교민들로부터 태극기아래 환영을 받았던 감격은 잊지 못할 추억이었다.
4년 뒤 베를린올림픽에서 손기정이 마라톤 금메달을 따내자 너무 기뻐 목을 놓아 울었다는 김은배는 말년까지 한국마라톤의 발전을 위해 애쓰다 80년3월6일 70세의 나이로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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