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62)두번째 좌절-제84회 올림픽 연유기(11)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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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베를린 이후 4년, 나의 두 번째 올림픽 도전은 역시 좌절됐다. 베를린 IOC총회에서 헬싱키와 치열한 유치경쟁 끝에 12회 올림픽을 유치한 동경대회가 유산된 것이다. 일본측은 그 동안 유럽과 미국에서만 열려온 올림픽이 아시아 지역에서도 열려야 한다고 주장하며 대회 집행예산으로 1천 5백만엔을 확보했다고 설명했다.
일본 올림픽 조직위는 즉시 준비에 착수, 시설규모와 경기일정을 조정하고 올림픽성화 중계 계획까지 짜놓았다.
올림픽을 유치한 일본은 서둘러 선수선발과 훈련에 착수했다.
1937년 3월 나는 동경올림픽 후보선수 5명중의 1명으로 선발됐다. 이때 선발된 선수는 57kg급의 남수일·이창화, 60kg급의 박동욱, 67.5kg급의 김용성 등 쟁쟁한 인물들이었다.
우리 선수들은 선발 직후 일본으로 건너가 합숙훈련에 들어갔다. 우리는 그토록 갈망하던 올림픽에 도전하게 됐다는 부푼 기대로 더욱 훈련에 정진했다.
나는 짧은 합숙훈련기간에 추상에서 l백 17.5kg을 들어 세계신을 세웠고 남수일도 역시 추상에서 95kg으로 세계신을 작성, 동료들의 사기를 드높였다.
그러나 우리의 꿈은 너무 일찍 깨져버렸다. 중국대륙까지 손아귀에 넣으려 광분하던 일본은 l937년 7월 7일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7월 16일 올림픽 조직위는 『비상시국에 직면해서 정신적이고 물리적인 국력을 동원해야 하는 정세로 말미암아 제12회 올림픽을 동경에서 열려던 계획을 취소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고 포기성명을 발표하고 말았다.
IOC는 부랴부랴 헬싱키로 개최지를 옮겼으나 이 역시 제2차대전의 발발로 무산돼 올림픽은 12년의 공백을 맞게된 것이다.
두 번에 걸친 올림픽 도전의 꿈이 허무하게 무너진 나는 37년 5년제 휘문고보를 졸업한 뒤 경성세무서에 취직, 평범한 직장인이 됐다. 그렇다고 역도를 중단한 것은 아니어서 새벽마다 집안마당에서 바벨을 들어올리며 언젠가 세계무대로 웅비할 그날을 대비했다.
휘문고보 시절을 돌이켜보면 나는 역도에 사생활을 모두 빼앗겨 친구가 별로 없는 편이었다. 그렇지만 학교수업에는 빈틈이 없어 3학년 때와 5학년 때는 학급 부반장을 하기도 했다. 당시의 담임은 시인 정지용 선생이었다. 3학년 때는 운동 중 발목이 부러져 한달을 쉬게됐는데 인력거를 타고 시험 보러 등교하던 기억이 난다. 그외엔 5년 동안 결석·지각이 한번도 없었다.
경성세무서에 다니면서도 나는 조선 신궁 경기 대회(일본인 단체인 조선체육협회주최)와 일본 명치 신궁 경기대회에 출전, 분풀이하듯 기록을 경신하며 대회를 석권했다.
1940년 엄청난 규모로 열린 일본 명치 신궁 경기대회에서 나는 추상에 1백 20kg, 남수일도 60kg급 추상에 1백 7.5kg으로 세계신을 세웠다.
당시 일본 명치 신궁 대회 역도는 단연 조선 선수들의 독무대였다. 자존심이 깎인 일본인들은 1941년 대회부터는 역도를 경기종목에서 제외시켜버렸다.
직장생활 4년만에 나는 은사인 이병학 선생의 권유를 받아 1941년 보성전문(고려대 전신)에 입학, 새로운 생활을 시작했다. 보성 전문 역도도장은 본관 3층에 있었는데 인촌선생을 비롯한 학교간부들이 큰 관심을 갖고 보살폈다.
보성 전문 역도부엔 나보다 1년 아래인 이철승을 비롯, 50여명이 있었는데 실전보다는 도를 닦는다는 분위기로 엄격하게 운영됐다.
2년 8개월만에 보전을 졸업한 나는 조선생명보험에 취직했다가 다시 징용을 피해 일본인 석탄회사에 들어갔다. 운동은 생각할 수도 없는 암울한 시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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