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54)출정전야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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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해방후의 체육시설은 빈약하기 짝이 없었다. 실내체육관은 YMCA와 한국체육관(초동)이 고작이었고 서울운동장이 유일하게 규격을 갖춘 그라운드였다.
이 때문에 선수단 훈련은 농구는 YMCA, 복싱·레슬링은 한국체육관, 육상·축구는 서울운동장에서 실시됐고 역도는 YMCA뒷마당, 사이클은 일반도로에서 연습할 수밖에 없었다. 지금과 같은 합숙훈련은 생각할 수도 없는 사정이었다.
우리 선수단엔 역전의 노장이 많았다. 선수 52명중 31명이 30세 이상이었고 축구는 16명중 11명, 농구는 9명중 7명, 역도는 8명중 6명, 레슬링은 4명중 3명이 30세 이상으로 구성됐다. 육상과 마라톤·권투·사이클에만 20대 선수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선수중 최고령자는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던 축구의 김용식과 베를린 올림픽 조선대표로 선발됐으나 출전이 좌절됐던 역도의 남수일로 당시 39세였다. 역시 베를린 올림픽에 출전했던 농구의 이성구는 감독으로 참가했고 장리진은 당시 32세의 선수였다.
반면 첫 올림픽 출전의 영광을 안은 홍일점 여자선수는 이화여중 재학중이던 박봉식으로 당시 19세의 최연소 선수였다.
선수단은 이같이 구성되었으나 출전에 따른 경비조달이 심각한 문제로 등장했다. 대회에 앞서 조직된 올림픽후원회는 국민의 성금으로 경비를 마련하자는 운동을 벌여 「올림픽후원권」을 발행키로 했다. 여기에 앞장선 것은 당시 민정장관이던 안재홍후원회장이었다.
비행기 사고로 순직한 전경무부위원장의 사진이 도안된 올림픽후원권은 1백원짜리로 당첨되면 1만원의 상금이 지급됐다.
47년12월부터 판매된 올림픽후원권은 1백여만장이 팔려 그 수익금으로 8만여달러를 마련, 올림픽 출전경비를 거의 충당할 수 있었다. 올림픽후원권은 우리나라복권의 효시로 기록된다.
선수단복은 그 나라의 경제·문화수준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상징이다. 그러나 해방후의 우리 물자사정은 궁핍하기 짝이 없었으니 안타까왔다.
우리 선수단은 단복으로 감색상의와 회색 바지를 한 벌씩 마련했는데 다른 한 벌은 아이로니컬하게도 일본에서 보내준 회색 양복지로 만들었다.
단복은 모두 혼방으로 두껍고 투박한 겨울옷이었다. 한 여름에 겨울옷을 입고 떠나면서도 우리 선수단은 태극마크를 단 단복에 자부심과 긍지를 느껴 불평 한마디 없었다.
올림픽 장도를 사흘앞둔 6월18일 하오 서울운동장에선 선수단 결단식을 겸한 시민 환송식이 베풀어졌다. 이 자리엔 이승만국회의장을 비롯, 체육계·미군정간부들이 모두 참석했고 수만명의 시민·학생들이 태극기의 물결을 이뤘다.
또 20일 밤엔 덕수궁광장에서 서울보건부인회 등이 주최한 올림픽선수단 환송 「모성대회」가 열려 따뜻한 격려를 받기도 했다.
초대 국회가 올림픽 출전 선수들에게 보내는 격려메시지를 채택할 정도였으니 그때 국민들이 올림픽에 얼마나 뜨거운 관심을 가졌는지 알 수 있다.
이제 모든 준비는 끝났다. 선수들은 첫 올림픽 출전에 가슴을 설레며 출정전야를 뜬눈으로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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