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영희의 사소한 취향

100엔짜리 인생이라 해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8면

이영희 기자 중앙일보 특파원
기사 이미지

이영희
문화스포츠섹션부문 기자

직업, 없다. 남자친구, 없다. 꿈? 물론 없다. 16일 개봉한 일본 영화 ‘백엔의 사랑’(사진)의 주인공 이치코(안도 사쿠라)는 전문대를 졸업한 후 일자리 찾을 생각도 없이 도시락 가게를 하는 엄마에게 기대 살아가는 서른두 살의 여자다. 헝클어진 머리에 목 늘어난 티셔츠를 입고, 화가 난 표정으로 어기적어기적 걷는다. 열심히 하는 일이라고는 초등학생 조카와의 게임뿐. 자신에게 관심 없는 세상과 그런 세상에 구애하지 않겠다는 포기가 만들어낸 기운 빠지는 인생을 살던 이치코. 어느 날 이혼해 집에 돌아온 여동생과 머리채를 뜯으며 싸우다 홧김에 집을 뛰쳐나온다.

어쩔 수 없이 독립했으나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100엔(약 1100원)짜리 물품들을 판매하는 잡화점에서 심야 아르바이트를 시작한다. “100엔 100엔 100엔 생활, 싸요 싸요 뭐든 싸요!”라는 노래가 늘 흘러나오는 곳. 그러다 잡화점에서 바나나를 사는 복싱선수 카노(아라이 히로후미)에게 관심을 갖게 되고, 그를 보기 위해 체육관을 찾았다가 ‘다이어트하러 왔느냐’는 관장의 오해로 복싱을 시작하게 된다는 내용.

기사 이미지

일본 영화 ‘백엔의 사랑’.

여기까지 보고 나면 ‘알 만하다’ 싶다. 한심하게 살던 청춘이 새로운 꿈과 사랑을 만나 성공을 향해 달린다는 내용이겠거니. 하지만 영화는 단순하지 않다. 이치코의 멋들어진 성공담 대신, 100엔 숍을 찾아오는 ‘100엔짜리’ 인생들을 그리는 데 공을 들인다. 하루 18시간씩 일하다 우울증에 걸린 점장, 유통기한 지난 음식을 훔쳐 가는 할머니, 있는 힘껏 노력한 적도 없으면서 포기는 빨랐던 한물간 복서…. 그들의 삶을 지켜보면서 “한 번쯤은 이겨보고 싶다”는 꿈을 갖게 된 이치코의 변화를 담담하고 설득력 있게 보여준다.

감동의 포인트는 이치코의 변화하는 눈빛이다. 복싱을 시작한 이치코가 밤낮없이 줄넘기를 하고, 계단을 뛰어오르고, 매대 사이에서 끊임없이 섀도 복싱을 할 때 보는 이의 마음도 덩달아 뜨거워진다. 내 것으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자신의 삶에 처음으로 애착을 갖게 된 순간, 열정을 쏟아부어 노력하고 싶은 대상을 발견한 사람만이 보여줄 수 있는 반짝이는 눈빛. 남들에겐 100엔짜리로 보이는 인생이라 해도, 나에겐 이것밖에 없으니 최선을 다해 싸워보겠다, 이런 결심의 순간은 쉽게 찾아오지 않는다.

무엇보다 주인공의 외면과 내면의 변화를 실감 나게 연기한 배우 안도 사쿠라의 공이 크다. 안도는 이 영화로 올해 일본 아카데미 여우주연상을 수상했다.

이영희 문화스포츠섹션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