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임문영의 호모디지쿠스

디지털세대, 암호 해독 통한 ‘방탈출’ 게임 즐기는 까닭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15면

요즘 홍익대·강남역 등에서 인기를 끌고 있는 ‘방탈출’ 카페는 일종의 게임방이다. 보통 한 시간 정도의 제한시간과 열쇠, 퍼즐 같은 힌트가 주어진다. 손님들은 추리와 암호 해독을 통해 답을 찾아 방을 탈출하는 것이 목표다. ‘방탈출’ 게임은 게임 장르 중 하나로 컴퓨터 게임으로 시작해 휴대전화 게임, 카페 형태로 발전했다. 우리나라뿐 아니라 세계적으로 인기다.

컴퓨터를 끌어안고 자란 디지털세대는 문자와 부호체계를 해석하는 데 익숙하다. 컴퓨터의 오래된 역할 중 하나가 암호 해독이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수학자 앨런 튜링(Alan Turing)은 ‘에니그마(enigma)’라는 독일군의 암호기계를 해독하기 위해 ‘프로그램이 가능한 디지털 컴퓨터’를 고안했다. 이 컴퓨터 덕분에 연합군은 독일군의 암호체계를 풀어내 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래서 나이 든 아재들은 ‘ㅂㄱㅅㅇ’가 무슨 뜻인지 모르지만 디지털세대는 ‘보고 싶어’로 즉시 해독해 낸다. 이 정도 초성 맞히기 놀이는 초등학생 때 끝낸다. 좀 더 난해한 방탈출 카페는 젊은 연인들에게 색다른 데이트 장소로, 친구들끼리는 함께 즐길 수 있는 체험공간으로 환영받고 있다. 그런데 어쩌다가 요즘은 사건을 추리해 범인을 잡는 게 목표가 아니라 ‘방을 탈출하는 것’이 목표가 됐을까.

원래 탈출 이야기는 영화의 단골 소재다. ‘빠삐용’(1973)부터 ‘쇼생크탈출’(1995)까지 과거 탈출 이야기는 자유에 대한 불굴의 인간 의지를 주제로 삼았다. 탈출 장소는 대부분 감옥이었다. 그런데 21세기를 눈앞에 두고 나온 영화 ‘매트릭스’(1999)에서는 감옥이 아니라 컴퓨터의 가상공간 매트릭스를 탈출해야 하는 인간이 등장한다. ‘올드보이’(2003)는 감옥이 아니라 누군가가 만든 방에 15년 동안 갇혀 있던 남자의 이야기다. ‘아일랜드’(2005)는 조작된 기억의 섬에서 탈출하는 복제 인간, ‘메이즈러너’(2009)는 미로를 탈출하는 소년들 이야기다.

방은 감옥과 다르다. 죄(罪)라는 개념이 없다. 80년대에는 스스로 방 안에 들어가 밖으로 나오지 않는 일본의 히키코모리(은둔형 외톨이)가 큰 사회문제였다. 고도성장의 끝 무렵 극단적으로 치열해진 경쟁 사회에서 스스로 빗장을 건 젊은이들은 30여 년이 지난 지금 인터넷만 이용하는 중년이 됐다고 한다. 요즘 우리나라도 관태기(관계의 권태기)를 겪으며 ‘혼밥(혼자 먹는 밥)’을 먹는 젊은이가 많다.

과거에 꿈꾸던 미래는 그림이 있었다. 밝은 태양 아래 깨끗한 바다, 아름다운 사람들이 풍요롭게 살아가는 도시. 젊은이들은 그런 밑그림 위에 열심히 일해 채색을 하며 삶을 완성시켜 나갔다. 그런데 현재의 미래는 그림이 없다. 빅데이터는 미세먼지처럼 답답하고 혼탁한 수많은 정보 속에서 무엇인가 의미와 통찰을 찾아내려 한다. 그림이 있어서 데이터를 찾는 게 아니라 데이터를 뒤져서 그림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다.

미래로 나아갈 그림이 보이지 않는다면 일단은 조금이라도 유리한 곳에서 버티기 할 수밖에 없다. 일반 직원이 과장급으로 승진하는 것을 거부할 수 있는 ‘승진거부권’. 최근 일부 대기업 노조에서 이 권리를 주장해 화제가 됐다. 더 적은 월급, 낮은 직급일지라도 과장으로 승진해 인사고과 대상이 되고 연봉제를 적용받는 것보다 낫다는 취지다. 앞으로 나가거나 위로 오르는 것이 더 이상 목표가 아니다. 현상 유지도 벅찬 세상이 됐다.

수백 년 동안 인류의 기상은 탐욕스러웠지만 또한 진취적이었다. 17세기와 18세기 인류는 미지의 신대륙을 발견하고, 산의 높이를 재고 동식물의 종류를 탐사했다. 19세기 말 미국인들은 서부를 개척하고 20세기에는 달에 사람을 보냈다. 그렇게 새로운 세상을 향해 앞으로 앞으로 달려가던 인류가 정작 21세기에는 그저 방 안에서 탈출하는 게 꿈이 돼 버린 것이다.

‘방탈출’ 게임은 유토피아를 향해 달려가는 성장의 시대가 끝나고 그저 이 치열한 경쟁과 불확실하고 답답한 저성장의 방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젊은이들의 무의식이 투영된 건 아닐까. 안타까운 현실에서 고군분투하는 디지털세대의 암호 해독을 응원하고 싶다.

임문영 인터넷 저널리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