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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산 윤선도

중앙일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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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조선조의 대표적 시조시인이었던 고산 윤선도의 유품들이 나라에 기증된다. 후손들이 고이 간직해 온 그 보물들이 나라의 문화재로 귀히 다뤄져야겠다.
그의 대표작은 흔히『오우가』라고 지칭된다.
『내 벗이 몇이나 하니 수석과 송죽이라/동산에 달 오르니 기 더욱 반갑고야/두어라 이 다섯밖에 또 더하야 무엇하리』하는게 그 첫귀다.
중고교 국어교과서에도 나오는 이 단가는 우리 국민 사이에서 자주 구송되기도 한다.
『어부사시사』를 그의 대표작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앞개에 안개 걷고 뒷뫼에 해 비친다/밤물은 거의 지고 낮물이 밀어온다/강촌 온갖 곳이 먼 빛이 더욱 좋다』
『산중신곡』이나『산중독신곡』을 보아도 그의 시재는 모두 뛰어나다.
그로해서 고산은 송강 정철과 쌍벽읕 이룬 조선조의 대표적 시인이자 문신으로 칭송된다.
특히 그는 우리말을 아름답게 조탁하는데 천재였다. 잊어버렸던 자연을 시로 승화시켜 우리 생활속에 재현시키는데 특히 뛰어났다.
김수장은『해동가요』에서「차옹가법 탈구청고」(때릍 벗어 맑고 높다)라고 했고, 홍수원도「부치도전인 창작신의」(옛사람의 길을 흉내내지 않고 새뜻을 창작했다)라고 했다.
그러나 고산의「고산」됨은 그 시문의 아름다움만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 고절 강기에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광해군시절 초야에 묻혀 사는 포의의 몸으로 분연히 일어나 권신 이이섬일파의 불의를 극구 비난하는 수천언의 상소로 조야를 크게 놀라게 했다.
이른바「병신상소」였다.
이는 정의의 필봉이었으나 오탁악세에서 그는 권간들의 농간에 몰려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8년간의 유배생활에서 태어난게 유명한『견회요』요『우후요』다.
우국일념을 노래한『견회요』는 청순한 선비의 지기가 오늘을 사는 사람들의 가슴에도 스며든다.
『슬프나 즐거우나 옳다하나 외타하나/내 몸의 희올 일만 닦고 닦을 뿐이어니/그 밖의 여남은 일이야 분별할줄 있으랴.』
그의 고절은 유배 17년, 피신생활 19년의 파란을 가져왔다.
그러나 그런 고통속에서 그는 주옥 같은 시 편 들을 남겼다.
고향 해남에서의 그의 삶은 오붓했고 부용동·금쇄동을 중심으로한 보길도의 생활도 노장적인 무위자연을 그대로 살린 것이었다.
그 고산의 유택은 지금 사적이 되어 있다. 그러나 도둑이 들끓는 이 세상에서 고산의 유품은 그의 고절처럼 고이 간직하긴 어려웠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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