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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의 문제들이 꼬여있는 곳, 구의역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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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린도어 정비 도중 숨진 김모(19)씨를 추모하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이어지고 있다. [뉴시스]

5월 28일,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 정비 작업을 하던 수리공이 전동차와 스크린도어 사이에 끼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2013년 1월(성수역), 2015년 8월(강남역)에 이어 똑같은 패턴으로 사고가 발생해 논란이 되고 있다.

고장 난 스크린도어는 2인 1조로 작업하라는 매뉴얼이 있지만 세 명의 사망자는 모두 혼자 작업을 하다 변을 당했다. 작업 수칙(매뉴얼)은 제대로 지켜지지 않았고 시스템에서도 여러 문제가 지적됐다.


ㅣ 안전보다 비용·효율 앞세운 경영방식


  서울 지하철 1~4호선에서 스크린도어를 손보던 세 명의 수리공이 목숨을 잃었다. 5~8호선에서는 스크린도어와 관련된 사망사고가 없다. 이 때문에 사고 원인이 개인의 부주의가 아닌 잘못된 시스템이라는 비판이 나온다.

지하철 1~4호선은 서울메트로, 5~8호선은 서울도시철도가 운영한다. 스크린도어 관리 시스템이 다르다. 서울메트로는 최저가 입찰로 낙찰 받은 외주업체에 스크린도어 관리를 맡긴다. 외주업체는 비용을 절감하기 위해 비정규직 근무자를 채용한다. 반면 서울도시철도는 내부에서 전담팀을 꾸려 직접 운영하며 정규직이 근무한다.

이번에 구의역에서 목숨을 잃은 김모(19)씨는 스크린도어 관리업체 은성PSD 소속 비정규직 노동자다. 안전상의 이유로 2인 1조 근무 원칙을 지켜야 했지만 용역업체의 적은 인력과 ‘신고 접수 뒤 1시간 이내 출동’ 원칙 때문에 근무 매뉴얼을 지키기는 사실상 힘들다. 결국 혼자 선로쪽에서 작업을 하던 김씨는 사고를 당했다. 근무자의 안전보다 비용과 효율을 중시한 경영방식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높다.


ㅣ 가방 속 컵라면과 청년들의 목소리


2014년 기준으로 서울 지하철 1~4호선에서 발생한 스크린도어 고장은 1만 2000여건, 하루평균 33건이다. 지하철 역사 직원이 해결할 수 있는 작은 고장을 제외하더라도 적지 않은 수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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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 씨의 가방 속 내용물. 각종 공구와 컵라면이 들어있다.[유튜브 화면 캡쳐]

공업고등학교를 다니던 중 취업한 김 씨의 작업 가방 속에는 공구들과 컵라면 하나가 들어있었다. 수시로 접수되는 고장신고를 해결하느라 끼니 해결할 시간도 없이 일을 한 김 씨의 사연에 애도 분위기는 확산되고 있다. 사고일 다음날이 김 씨의 생일인 것으로 알려져 안타까움은 커졌다. 시민들은 사고 현장을을 찾아 꽃을 놓고 포스트잇에 추모의 글귀를 적어 붙이고 있다.

청년들은 이번 사건으로 드러난 문제점을 적극적으로 지적했다. 김 씨의 친구와 다수의 청년단체들은 ‘그의 죽음은 불의의 사고가 아니다’라는 제목의 기자회견을 열어 서울메트로의 미숙한 대처와 경영 문제를 지적했다. 이들은 “이미 두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음에도 또 다시 발생한 이번 사건은 서울메트로의 타살이다”며 “인건비 줄이려는 최저가 외주업체 입찰 방식, 현실성 없는 2인 1조 안전규정 만들어놓고 ‘김군’ 잘못이라고 우기는 서울메트로를 규탄한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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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의역에 추모 현장에 붙어있은 메시지. 안별 기자


ㅣ 앞 다퉈 방문하는 정치권, SNS 논란도


 박원순 서울 시장은 31일 출근 전 김 씨의 시신이 안치된 병원을 혼자 방문해 유족들을 만났다. 이어 사고현장을 방문해 시 산하기관 외주화를 전면 개선하겠다고 밝혔다. 이어 박 시장은 이번 사건의 책임은 전적으로 서울메트로에 있음을 분명히 하고 시장으로서 서울시민에게 머리 숙여 사죄했다.

임기를 시작한 20대 국회위원들도 사고 현장을 찾았다. 정진석 새누리당 원내대표는 "스크린도어 안전관리 실태를 점검한다"고 밝히며 구의역으로 간 뒤 '이윤보다 안전이, 돈보다 생명이 우선입니다'라는 추모의 메모를 남기기도 했다.

더불어민주당 김종인 비상대책위 대표와 당 을지로위원회 위원들도 사고 현장을 찾았다. 김 대표는 “지나치게 경비절감 측면만 고려하다보니 인명 문제를 고려치 않아 발생한 사고”라며 안타까워했다. 다른 야당의원들도 기존 일정을 미루거나 취소하며 앞 다퉈 사고 현장을 방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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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 대표가 트위터에 올린 추모 메시지. 해당 게시물은 삭제된 상태다[사진 안철수 트위터 화면 캡쳐]

국민의당의 안철수 공동대표는 SNS에 올린 추모 메시지 때문에 곤욕을 치렀다. 안 대표는 30일 “가방 속에서 나온 컵라면이 마음을 더 아프게 한다. 조금만 더 여유가 있었더라면 덜 위험한 일을 택했을지도 모른다”는 글을 자신의 트위터 계정에 올렸다.

이에 네티즌들은 안 대표가 시스템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고 '여유가 있었더라면...'과 같은 표현을 쓴 것에 대해 비판했다. 더민주 김병관 의원은 “조금의 여유도 없는 사람이 택하는 직업이라도 덜 위험하게 만드는 게 정치인이 해야 할 일일 텐데”라는 글을 트위터에 올리며 안 대표의 발언을 지적했다. 안 대표의 해당 게시물은 삭제된 상태다.


ㅣ 오열하는 어머니, 시급한 문제 해결


31일 김 씨의 유가족과 시민단체들은 구의역 대합실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원인규명을 촉구했다. 현장에는 김 씨의 어머니가 참석해 마이크를 잡고 발언했다.

김 씨의 어머니는 “스스로 대학을 포기하고 공고에 진학해 돈을 벌어 집에 갖다 줬다. 차라리 게임을 하고 술을 마시며 놀고 있었다면 살아있었을 것이다”고 말하며 눈물을 터뜨렸다.

이어 "내가 '회사 가면 상사가 지시하는 대로 책임감 있게 해야 한다'고 가르쳤다"면서 "우리 사회는 책임감 강하고 지시 잘 따르는 사람에게 남는 것은 죽음뿐인데 애를 그렇게 키운 게 미칠 듯이 후회된다"고 말해 주변을 안타깝게 만들었다.

이번 사건을 통해 ‘소 잃고 외양간도 못 고친’ 우리사회의 문제점이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명확하게 진상을 규명하고 문제점을 개선해 또 다른 누군가의 어머니가 오열하지 않도록 정치권과 사회 전반의 노력이 필요한 상황이다.

김기연 인턴기자 kim.kiye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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