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사설

반기문 잔치 끝나…친박 이제 뭐할 건가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30면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이 어제 “저의 방한 목적은 개인적이거나 정치적인 것과 무관하다. 비공개 기자간담회 발언이 과대·확대·증폭됐다. 남은 임기를 잘 마치도록 국민 여러분이 도와달라”는 말을 남긴 채 뉴욕으로 출국했다. 5박6일간의 ‘반기문 잔치’는 끝났다. 반 총장의 방한 일정은 정교하게 짜여진 동선에 따라 진행됐다. 내년 1월 1일 한국 시민으로 돌아와 출마여부 결심을 공식적으로 밝히겠다고 했지만 국민에겐 ‘반기문을 잊지 말라’, 정치권엔 ‘나의 대선출마를 상수(常數)로 생각하라’는 주문을 하고 떠난 것으로 봐야 한다. 반 총장은 임기가 7개월 남았는데 세계기구의 최고위 공직자로서 지나치게 정치적인 처신을 했다는 일부의 비판을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할 것이다.

반 총장의 대권성 행보에 온 세상이 들썩이며 신경을 곤두세우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는 한국 정치권의 인적 기반이 이토록 부박하고 취약했던가 하는 실망감을 숨길 수 없다. 반 총장은 평생을 정치에 발을 들여놓지 않았고 10년간 외국에서 살았다. 아무리 권세욕이 있더라도 정치권이 국민의 신뢰를 얻고 안정돼 있었다면 그가 쉽사리 권력의지를 표출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반기문 잔치는 반 총장의 의욕에서 생겼다기보다 정치권의 무능과 불신, 불안이 자초했다는 점을 냉정하게 짚어야 한다.

더불어민주당의 이종걸(5선·전 원내대표) 의원은 출국을 준비하는 반 총장의 뒤통수에 대고 “대통령이 되면 국민이 시궁창에 버리는 이름이 될지 모르겠다. 반 총장 같은 사람이 나타나 재앙이라고 생각한다”는 20대 국회 1호 막말을 했다. ‘반기문 현상’을 오로지 정파의 이해득실과 정치공학으로만 바라보는 천박하고 상스러운 인신공격이 아닐 수 없다.

반 총장을 꽃가마에 태워서라도 불러들이겠다는 새누리당의 나약한 몸부림도 더 봐주기 어려웠다. 방한 첫날부터 정진석 원내대표를 비롯한 당의 중진들이 상전 모시듯 그의 주변을 에워쌌고, 경북 행사에는 의원들이 줄줄이 따라 다니며 대권후보에게 눈도장을 찍는 듯한 장면을 연출했다. 굳이 정치적 인연으로 따지자면 반 총장은 노무현 대통령 시절 외교부 장관을 지낸 뒤 유엔 사무총장에 선출돼 더민주에 뿌리가 있는 사람이다.

이런 반 총장에게 새누리당이 호들갑을 떨며 접근하는 것은 4·13 총선 참패 뒤 당이 대선주자의 빈집처럼 황폐해졌기 때문이다. 작은 혁신의 움직임마저 친박 패권주의가 짓밟는 바람에 전통적인 보수지지층의 이탈이 심각해졌다. 이 상황이 두려워 지푸라기라도 잡겠다는 게 반기문에게 구애하는 새누리당의 심정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반기문 현상을 당의 개혁을 지체시키거나 거부하는 빌미로 삼는 것에 속아넘어갈 유권자는 없다. 친박이 김용태 의원을 끌어내리고 대신 앉힌 김희옥 혁신위원장의 개혁 약속에 감동하는 국민도 별로 없다. 새누리당은 지배세력인 친박이 확실하게 계파를 해체하고, 당권이니 대권이니 하는 욕심의 언어를 포기하는 등 내적 혁신을 이룬 뒤에나 반기문 카드를 꺼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