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희궁 복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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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1면

서울에 또하나의 역사 문화 명소가 선을 보이게 되었다.
서울시는 구서울중·고교 자리에 있었던 경희궁을 발굴 88년까지 복원하여 시민공원으로 개방하겠다고 밝혔다.
경희궁은 조선조 광해군9년(1617년)에 창건된 대형 궁궐이었다.
지금은 그 궁터가 약 3만평밖에 남지 않았지만 당시는 7만2천8백평에 대소 전각과 문루등 건물만도 98개가 들어 있었다.
광해군이 이 궁궐을 짓게된 내력 속엔 역사의 아이러니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 적지않다.
선조의 둘째아들로 33세에 등극한 광해군은 요즘말로 약간 노이로제 비슷한 증세가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그는 늘 밝고 조용한 거처를 원했고, 새 집을 지으면 각종 기화, 이목에 괴석를 모아놓고 즐겼다고 한다.
그때 광해군의 주변에는 풍수지리를 하는 사람들이 들끓어 교하(현 파주근처)로 도읍을 정해야 한다느니,
「왕기」가 있는 인왕산에 새 궁궐을 지어야한다는 주장들이 분분했다.
결국 광해군은 인광산 밑에 경덕궁이란 궁호로 새궁월을 짓기로 했다
그런데 1백여호의 민가가 들어 있던 그 터전에는 선조의 5남이며 자신의 동생인 정원군이 살고 있었다.
어떻게 해석하면 정원군의 「왕기」를 없애려는 뜻도 있었음직 하다.
그러나 광해군은 그 경덕궁의 안공하고 3년후에 인조반정으로 폐위되었는데 공교롭게도 인조는 정원군(원종)의 아들이었다.
경덕궁은 영조36년(1760년)에 경희궁으로 이름을 바꿨다.
고종은 국운이 기우는 1899년께 경희궁의 이웃인 경운궁(현 덕수궁)에 머무르면서 울적할 때면 어린 순종을 데리고 경희궁에 나가 친위군의 군사훈련을 열심히 지켜보았다고 한다.
그때 고종은 가슴 속으로 경희궁터가 선대의 고고를 되새기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당시엔 양궁 사이에 구름다리(운교)가 있었다.
창건이후 왕궁다운 왕궁 노릇 한번 못한 비운의 경희궁은 그나마 1909년 일본의 침략정책에따라 대부분의 건물이 헐리고 그 자리에 일본인 학교가 들어선 것이다.
당시의 경희궁을 현재의 구획으로 따져 보면 충정로 큰길 언덕에서 서쪽으로 도성을 따라 고려병원 국립기상대, 다시 동쪽으로 꺾여 사직동, 내수동과 신문로의 경계를 이루는 능선을 따라 신문로1가 구세군 본영에 이르는 광범위한 지역이었다. 그 주위에는 동쪽의 광화 흥원·남쪽의 개양, 북쪽의 무덕, 서쪽의 숭의등 5문이 있었다.
따라서 경희궁의 복원은 역사를 되새겨 보기 위해서도, 또 고도 서울의 정취를 살리기 위해서도 큰 의미를 갖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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