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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산 꺾은 캘리포니아 와인 ‘미국을 만든 101가지’에 올렸다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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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17면


세계 속으로 40년 전 ‘파리의 심판’ 주역 그르기치



|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와인 만들어
1976년 파리 시음회서 화이트 부문 1위
벨 전화기 등과 미국 역사의 유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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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캘리포니아 와인의 진군을 알린 ‘파리의 심판’ 이후 40년. 올해 93세인 마이크 그르기치는 여전히 와인을 즐기며 ‘그르기치 힐스’의 포도밭을 가꾸고 있다. 대학 시절 우산 살 돈이 없어 쓰기 시작한 베레모가 평생 그의 트레이드 마크가 됐다. [사진 그르기치 힐스]

1976년 5월 24일 프랑스 파리에서 세계 와인 역사를 뒤흔든 사건이 벌어졌다. 화이트와 레드 각 10종씩 늘어놓은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예상을 깨고 캘리포니아 와인이 모두 1위를 차지한 것이다. 당시 현장에 있던 관계자가 급히 고국의 와이너리에 보낸 전보 내용은 이러했다.

‘5월 24일 파리 시음회의 기절초풍할 결과/ 프랑스 일류 와인이 포함된 아홉 종을 제치고 우리가 일등을 차지함/ 프랑스 최고 전문가들의 익명 시음 결과.’

시음회 와인의 구성은 화이트·레드 각각 캘리포니아산 6종, 프랑스산 4종이었다. 프랑스산에는 샤토 무통 로칠드, 바타르- 몽라셰 같은 최고급 그랑 크뤼 와인들도 포함됐다. 아무도 프랑스 와인의 압승을 의심하지 않았다. 행사 기획자의 의도 역시 고품질 와인 사이에 캘리포니아 제품을 섞어 놓음으로써 홍보 효과를 얻으려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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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크 그르기치가 만든 화이트 와인 ‘그르기치 힐스 샤도네이’(왼쪽)와 레드 와인 ‘그르기치 힐스 카베르네 소비뇽’.

총 9명의 프랑스 전문가가 내놓은 결과는 충격적이었다. 화이트와 레드 모두 캘리포니아 와인이 1위로 꼽혔다. 화이트 1위는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 1973’, 레드 1위는 ‘스태그스립 와인셀러 카베르네 소비뇽 1973’이었다. 시음자 본인들도 믿지 못하는 반전이었다. 당시 현장에 있던 ‘타임’지 기자가 이를 ‘파리의 심판(Judgement of Paris)’이라는 제목으로 보도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와인업계에선 이 사건을 계기로 신대륙 와인에 대한 선입견이 사라지고 구세계와 신세계의 역사적 자리바꿈이 시작됐다고 본다.

앞서 언급한 전보가 도착한 곳은 캘리포니아 나파밸리의 와이너리 ‘샤토 몬텔레나’. 화이트 1위 샤도네이를 만든 와인메이커 마이크 그르기치는 소식을 듣고선 양조장 주변을 춤추듯 돌면서 외쳤다. “난 다시 태어났어! 이건 기적이야!”

‘파리의 심판’ 이후 40주년. 올해 93세인 그르기치는 여전히 포도밭을 가꾸는 낙으로 살아가고 있다. 최근엔 회고록 『기적이 가득한 와인 잔』을 펴냈다. 본지와 e메일 인터뷰에서 그르기치는 “와인이 없는 내 삶을 상상할 수 없다. 나는 무에서 유를 만들어 냈다”고 회고했다.

40년 전 파리 시음회가 열린다는 것을 알고 있었나.
“시음회가 열리는 것도,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가 그 안에 포함된 것도 몰랐다. 다만 ‘파리의 심판’이 있기 1년 전인 1975년 5월 샌디에이고에서 열린 블라인드 테이스팅에서 내 와인이 1위를 한 바 있다. 당시 프랑스 부르고뉴의 대표적인 화이트 와인들, 즉 루이 자도의 뫼르소, 조셉 드루앙의 퓔리니 몽라셰와 바타르- 몽라셰를 꺾었기에 내가 그들에 못지않거나 더 뛰어난 와인을 만들었다는 것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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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의 심판’에서 화이트 부문에서 우승한 ‘샤도네이 1973’

당시 캘리포니아 와인은 무명에 가까웠다. 어떻게 그런 ‘기적’이 가능했을까.
“로버트 몬다비 와이너리에서 일할 때 매주 월요일 우리 와인과 프랑스 와인의 비교시음회를 열었다. 몬다비는 ‘언젠가 우리가 프랑스와 견줄 수 있는 와인을 만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76년 파리 테이스팅을 통해 그 예견을 뛰어넘는 성취를 해낸 셈이다. 샤토 몬텔레나에 있을 때나 내 이름으로 ‘그르기치 힐스’를 세웠을 때나 내 목표는 월드클래스 와인을 만드는 것이었다.”

| ‘월드클래스 와인’ 아메리칸 드림 이뤄
82년 레이건·미테랑 파리 만찬장에도
프랑스산 대신 그르기치 와인 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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캘리포니아 나파밸리에 위치한 ‘그르기치 힐스’ 와이너리의 입구

그르기치는 ‘오퍼스 원’ 등 프리미엄 와인을 만든 로버트 몬다비와 68년부터 72년까지 함께 일했다. 이후 샤토 몬텔레나의 와인 메이커로서 ‘샤도네이 1973’을 만들었다. ‘파리의 심판’ 이듬해인 77년 힐스 가문과 손잡고 ‘그르기치 힐스 와인셀러’를 설립해 CEO 겸 양조자를 맡았다. 그의 와이너리가 내놓은 ‘샤도네이 1979’는 82년 다시 뉴스의 주인공이 된다. 그해 프랑스를 방문한 로널드 레이건 미 대통령이 프랑수아 미테랑 대통령과 함께 한 만찬 자리에 오른 것이다. 미국 대통령이 ‘와인 왕국’ 프랑스에서 열린 정상 만찬에서 미국산 와인을 처음 따른 사건은 일약 화제가 됐다.

레이건과 친분이 있었나. 그가 프랑스 방문 때 그르기치 와인을 내놓게 된 배경은.
“레이건은 대통령으로 선출되기 전 8년간 캘리포니아 주지사를 지냈다. 캘리포니아 와인에 익숙해 백악관에서도 즐겼다. 내 와인이 당시 만찬에 어떻게 포함됐는지는 모르겠지만 확실한 건 그가 ‘파리의 심판’을 인지하고 있었고, 프랑스 와인들을 꺾은 와인메이커가 만든 캘리포니아 와인을 내놓길 원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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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창기 포도밭 개간 장면

와인업에 40여 년 종사하면서 가장 뿌듯했던 일은?
“2008년 ‘양조가 명예의 전당’(Vintner’s Hall of Fame)에 헌액된 것. 그리고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 1973’이 스미스소니언 재단에 의해 ‘미국을 만든 101가지 물건들’의 하나로 선정된 것이다. 내가 만든 와인이 에이브러햄 링컨의 모자, 알렉산더 벨의 전화기, 닐 암스트롱의 우주복 같은 것들과 나란히 역사의 일부가 되다니. 내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의 꿈, ‘캘리포니아에서 와인을 만들겠다’를 뛰어넘은 영광이다. 내가 ‘무’로부터 어떤 것을 시작했다는 것이 자랑스럽다.”

| 크로아티아 출신, 35세때 미국으로
“와인은 반려자, 93세인 지금도 즐겨
고국 크로아티아산 품질 향상이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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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0년대 ‘샤토 몬텔레나’에서 와인메이커로 일하던 시절의 마이크 그르기치

마이크 그르기치의 본명은 밀옌코 그르기치. 지금은 크로아티아에 속하는 유고슬라비아의 한 시골마을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그레브대에서 포도 재배와 양조를 공부한 뒤 31세에 미화 32달러를 들고 서독으로 망명했다. 4년 뒤 캘리포니아에 발을 디딜 때부터 그의 꿈은 자신의 와이너리를 갖는 것이었다.

당신은 35세에 무일푼에 가까운 신세로 미국에 도착했다. 크로아티아 출신이라는 ‘이국적인 배경’으로 성공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내가 살던 곳은 공산당이 지배하고 있었다. 와이너리를 갖겠다는 꿈을 이루는 게 불가능했다. 미국에선 부모가 누구인지, 정치이념이 무엇인지 중요하지 않았다. 자신의 재능을 키우고 열심히 일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나는 ‘포도나무는 주인의 발자국 소리를 듣고 자란다’는 옛말을 믿었다. 포도알이 잘 숙성됐나 보려고 얼마나 먹었던지 식사를 거르기도 했다. 타고난 ‘유럽적 미각’이 그르기치 힐스의 와인 스타일, 즉 좋은 산미, 우아함, 숙성능력을 정립하는 데 도움이 된 것 같다.”
고국 크로아티아는 당신에게 어떤 의미인가.
“나는 자랑스러운 미국인이지만 동시에 크로아티아인인 것이 자랑스럽다. 1990년 공산정권이 붕괴된 뒤 고향에 ‘그르기치 빈야드 와이너리’를 설립하고 현지 와인 품질 향상을 도왔다. 수년간 ‘루츠 오브 피스(Roots of Peace)’를 도와 지뢰를 제거한 땅을 농업지로 변모시키는 일을 했다. 교육에도 관심 많아 ‘크로아티아 장학생 펀드’에 25년째 기부하고 있다. 크로아티아의 와인메이커가 월드 클래스급 와인을 만들도록 하는 게 내 목표다.”
요즘도 와인을 즐기는가. 당신에게 와인이란 무엇인가.
“지금도 나는 와인을 즐긴다. 어릴 때부터 와인은 삶의 일부였다. 어머니는 11남매의 막내인 내가 두 살 반이 되도록 모유 수유를 해줬다. 모유를 끊을 때 어머니는 베반다(물과 와인을 반반씩 섞은 음료를 가리키는 크로아티아어)를 주시면서 ‘언젠가 내게 고마워하게 될 거야’라고 하셨다. 어머니 말씀이 옳았다. 난 그 음료를 좋아했고 와인을 줄곧 좋아했으니까. 와인이 없는 내 삶이란 상상할 수 없다.”
[S BOX] ‘심판’ 10년 뒤 재시합서도 캘리포니아 와인이 우승

허를 찌르는 결과가 나온 ‘파리의 심판’ 이후에도 프랑스 와인업계는 ‘패배’를 인정하지 않았다. 특히 당시 시음한 와인들이 1970~73년산으로 비교적 ‘어린 와인’이란 걸 문제 삼았다. 프랑스 와인은 숙성을 거치면서 향상되기에 10년 이상 묵히면 다른 결과가 나올 거란 예상이었다.

이를 시험하듯 86년 9월 미국 뉴욕의 프랑스 요리학교(FCI)에서 파리 시음회 10주년 기념 재시합이 열렸다. 샤도네이 와인이 시음 적기를 넘겼다는 판단하에 재시합은 적포도주 부문에 한정됐다. 상세한 순위는 10년 전과 달랐지만 1·2등은 또다시 캘리포니아에 돌아갔다. 우승은 나파밸리의 클로 뒤발 1972년산이었다. 심사위원 다수는 10년 전과 마찬가지로 “프랑스산과 캘리포니아산을 구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파리 시음회가 ‘기획된 쇼’였다는 오명 또한 벗겨졌다.

지난 24일 서울 신사동의 와인바 ‘뱅가’에서 ‘파리의 심판’ 40주년을 기념하는 와인 모임이 열렸다. 40명의 와인 애호가와 미디어 관계자들이 4가지 와인을 시음했다.

‘파리의 심판’ 화이트 우승작인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와 마이크 그르기치가 만든 ‘그르기치 힐스 샤도네이’, 레드 부문의 ‘하이츠 셀라 나파밸리 카베르네 소비뇽’과 레드 우승작 ‘스태그스립 SLV 카베르네 소비뇽’이다. 이 가운데 참가자들은 ‘샤토 몬텔레나 샤도네이’를 ‘2016 서울의 심판’ 우승작으로 꼽았다.

강혜란 기자 theother@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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