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해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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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2면

『이창』이란 영화가 있었다. 망원경으로 남의 아파트 뒤 창문을 통해 그들의 갖가지 사생활을 들여다보는 얘기다. 인간에겐 이처럼 남의 프라이버시 (사생활)를 엿보고 싶어하는 욕망이 잠재해 있는 모양이다.
신문에 프라이버시문제가 본격적인 의미에서 처음 등장한 것은 후에 미국 최고재판소 판사가 된 「새뮤얼·워런」과 「루이스·브랜데이즈」가 1890년 공동으로 하버드 법률 평론에 『프라이버시의 권리』란 논문을 발표하고서부터다.
「워런」이 이 논문을 쓰게 된 동기가 재미있다. 그가 변호사 시절 보스턴의 한 저택에서 벌어진 댄스파티에 부인과 함께 참석했는데 다음날 신문에 이들 부부의 춤추는 사진이 가십으로 크게 보도되었다. 「워런」은 이것을 프라이버시의 침해라고 격노한 것이다.
그러나 언론에서는 이와 상충되는 개념으로 국민의 「알 권리」(the right of know)가 있다. 이 말이 처음 쓰인 것은 1945년 당시 AP통신의 중역이었던 「켄트·쿠퍼」가 어떤 연회석상에서 한 연설문 속에서였다. 며칠 후 이 말은 뉴욕 타임즈 사설로 소개되어 더욱 유명해졌다.
어떻게 보면 신문의 속성은 국민의 「알 권리」와 「프라이버시의 침해」라는 긴장관계 속에 이루어지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국민의 「알 권리」와 함께 진실의 보도만으로 신문의 사명을 다 하는 것은 아니다. 유괴사건이나 가정파괴범죄·이혼·치정관계 기사는 사실 그대로 보도하기가 어렵다. 피해자의 신변 안전과 피해자 주변의 가족에 대한 인권·명예가 문제가 되기 때문이다.
가까운 예로 우리는 지난 겨울 독극물 사건을 겪었다. 처음 이 사건이 터졌을 때 신문들은 사실 그대로 보도해야 좋을지, 공익을 위해 비공개로 해야 좋을지 망설였다.
온 국민을 인질화시킨 이 사건을 신문에 보도함으로써 사회에 패닉현상을 불러일으킬 것을 우려해서였다.
치안본부는 30일 범죄사실을 공개할 때 피해자의 프라이버시를 최대한 보호한다고 발표했다. 사실 우리 주변에는 피해를 당하고도 신고를 기피하는 경향이 많다. 피해만 해도 억울한데 꼬치꼬치 장롱 속의 「사생활」까지 공개되는 것을 꺼리기 때문이다. 이런 심리의 뒤에 숨어서 좋아할 사람은 강도나 절도뿐이다. 오히려 「격려」하는 역설적 효과까지도 있다.
치안당국의 이번 결단은 국민의 생명·재산을 보호하는 경찰의 본분을 모처럼 확인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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