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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고분 벽화엔 고구려인 기개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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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집안에는 7월3일부터 6일까지 4일간 머물렀다. 이번 방중의 가장 큰목적은 물론 광개토대왕비의 현상조사였으나 그 일만으로 모든 문제가 풀릴리 없었다. 일정상 이 정도밖에 들를수 없다는것은 동경을 떠나기전에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표단에 참가한 것은 본격적인 조사를 위한 준비작업으로 간주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비면에 대한 과학적인 조사가 불가피 하다는것을 입증하는데 주력했으며 전회 글에 언급한 것처럼 후일 장춘서 열린 심포지엄에서 이점을 강조했다.
비면을 관찰하면서 필자는 남북의 학자가 비의 공동조사에 참가할 그 날을 생각하고 있었다. 국토가 분단되어 40년, 고대 유적과 문물을 앞에두고 서로 허심탄회하게 토론한다면 우리의 역사연구는 더욱 풍부해질것이 아닌가. 또한 이같은 작업은 남북의 긴장상태를 풀어나가는데도 큰 기여가 될것이 아닌가.
필자는 뒷날의 공동조사에 희망을 걸고 비와 작별, 장군총으로 떠났다. 장군총은 광개토대왕비의 동북방, 민가와 과수원 사이의 오솔길을 거로 7∼8분 올라간 곳에 있었다.
장군총은 거대한 화강암의 절석으로 쌓아 올린 7층방형의 분묘, 기저의 1변 길이33m, 높이13.6m로 원형을 유지하는 고구려의 유일한 적석총이다. 철제계단을 따라 정상까지 돌아보고 석실내부를 참관했다. 현장은 1936년 조사시와 다름없었다.
예산이 적은 속에서도 보존에 힘쓰고 있는 성의에 머리가 숙여졌다. 묘성은 1변 1백m.
장군총의 정상에 서면 동남쪽으로 집안평야가 한눈에 보이며 4천5백m 떨어져 광개토대왕비가 서있다. 이같은 입지조건으로 장군총을 광개토대왕의 무덤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일행은 광개토대왕능의 또 하나의 후보인 대왕능을 찾았다.
묘성은 1변 3백m로 장군총의 묘성을 크게 능가하며 우측의 묘는 파괴된지 오래지만 기저의 1변은 67m나 되는 거분이다.
우선 기저부분을 돌아보고 역석을 밟으며 정상으로 올랐다. 기와와 전(전)의 파편이 산재하고 있었는데 이 무덤의 성격을 좌우하는것은 「원대왕능안여산고여악」이라고 새긴 전의 출토다.
광개토대왕은 일명 호태왕이고 고구려의 다른 국왕명에 태왕·대왕의 명칭이 없기 때문에 이 묘를 광개토대왕능으로 보아야한다는 견해다.
왕건군·방기동등 중공학자들은 대왕능=광개토대왕능설이었다. 그러나 이문제는 다른 거대적석총인 임강총·북대총·간추총·서대총등의 학술조사와 편년적 연구를 기다려야 결론이 나올 것이다.
답사대상의 하나인 임강총은 수백m 떨어져 있었다. 그러나 국경인 압록강을 내려다보는 위치에 있기때문에 공개할수 없다는 설명이었다.
고구려가 집안을 수도로 정한것이 기원1세기. 420년에 평양으로 천도했지만 수많은 고분들과 유적을 이곳에도 남겼다. 길림성 고고·문물연구소 방기동부소장에 의하면 집안일대의 고구려고분은 대소 1만1천기였으나 도시화로 파괴, 7천기가 현존하고 있으며 그 중 1965년 이래 약 1천기를 조사·정리했다고 한다.
이 고분들은 적석총과 토총으로 나누어지며 벽화고분은 약20기대형의 토총에서 볼수 있으나 적석총에도 벽화를 그린것이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설명은 없었음) .
벽화고분중 가장 오래된 것은 칠성산 중복에 있는 제1368호분으로 장천1호분과 같은 가옥의 그림이 있으며 시기는 4세기로 올라간다는 설명이었다.
일행에 공개된 벽화고분은 유명한 무용총과 씨름무덤(각저총)·오괴분 제5호였다. 인물· 풍속도를 그린 무용총과 씨름무덤은 4세기말∼5세기초로 추정되는 널리 알려진 무덤. 두무덤의 입구에는 습기와 온도차를 조절하기 위해 「ㄱ」자 통로가 첨가돼 있었다.
석실내부에는 습기로 수적이 많았고 겨울의 동결로 우회면상의 벽화는 군데군데 박낙돼 있었다.
제습과 온도조절장치가 있어야한다는것을 중공학자들도 통감하고 있었으나 예산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50여년전에 이 무덤을 조사한 「미까미」(삼상차남)씨가 색채는 조금도 변화되지 않았다고 경탄의 소리를 울린것이 인상적이었다.
오괴분은 시기가 내려가는 것으로 4호와 5호분에는 사신도가 그려져 있다. 일행이 참관한것은 시간관계로 제5호분. 여기는 벽화보호를 위해 선도앞에 큰방을 마련, 다시 「┕+」형 통로가 첨가돼 있었다.
벽화는 남벽에 주작, 동벽에 청룡, 북벽에 현무, 서벽에 백호, 천정부에는 옥을 추켜드는 용과 성신, 신화에 나오는 인물들과 선녀, 화강암의 벽에 오색의 안료로 그린 벽화들이 전등빛으로 부상할 때 일행은 『와』하는 환성을 올렸었다. 고구려인의 기개를 상징하듯이 우리들에게 육박해 왔기때문이다.
북한에서도 해방후 수많은 고구려벽화가 발견되었으며 한국서는 최근 영담서도 출현했다. 남북학자들이 집안과 남북한의 벽화를 공동으로 조사하는 그 날을 위해 더욱 소리를 높여야 하겠다고 마음다지며 숙소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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