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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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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 01면

옥시 사태로 본 ‘사과의 경영학’

옥시 ‘일단 지켜보자’ 5년 버티다 해결 기회 놓쳐
채선당·코오롱 등 ‘법정 밖의 법정’ 슬기롭게 대처
윤리경영도 투자…정밀한 위기감지시스템 갖춰야

세계 200여 개 나라에 각종 생활용품을 파는 기업, 세계경제포럼이 지난해 ‘지속가능경영 100대 기업’ 중 7위에 꼽을 정도로 안정된 경영을 자랑했던 기업, 영국인이 존경하는 기업 10위. 그 회사가 바로 가습기 살균제 사건의 핵심에 있는 옥시레킷벤키저다.

이렇게 잘나가는 회사가 어떻게 자사 제품을 쓴 고객이 239명(환경보건시민단체 접수 기준)이나 사망하도록 위기를 키웠을까. 이에 대한 의문은 “옥시 사태를 분석해 국내 기업들이 반면교사로 삼아야 한다”는 학계의 주장으로 이어진다.

기업 위기관리 전문가인 정용민 스트래티지샐러드 대표는 “기업의 존폐를 위협할 정도로 심각한 위기는 크게 오너 관련, 범법 관련, 내부고발 관련의 세 가지 범주 안에서 일어난다”며 “옥시 사태는 범법 사실이 원인이 돼 이게 오너와 조직문화의 위기로 확산되도록 방치된 사례”라고 진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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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시 사태는 크게 3기로 나뉜다. 1기는 2001년 영국 기업에 인수된 뒤 가습기 살균제가 팔려나간 10년간, 2기는 보건복지부·환경부가 문제의식을 갖고 개입한 2011~2015년, 3기는 사법기관과 민심의 분노가 폭발한 2016년 이후다.

정 대표는 “옥시 사태는 ‘위기 대응 실패의 종합세트’”라며 “1기 땐 문제를 인지하고도 본사와 정확한 커뮤니케이션이 안 됐고, 2기 때는 문제 해결을 법무팀에 일임함으로써 소비자의 분노 관리에 실패했다”고 분석했다. 그는 “사법 당국이 나서기 전인 1~2기 동안 사내에 ‘일단 지켜보자’는 기조가 강했고 그러면서 해당 제품을 계속 판매하는 바람에 문제가 커졌다”며 “임상시험, 판매 중지, 피해자 보호 등의 조치가 3기보다 2기, 2기보다 1기 때 이뤄졌어야 했다”고 주장했다.

전문가들은 위기상황에서 리더가 실행해야 할 필수 절차로 ‘사과의 방식’ ‘상황 수습 방안’ 그리고 ‘재발방지 노력’을 꼽는다. 특히 이 세 가지를 책임 있는 인사가 빠른 시간에 나서서 지휘해야 분노 확산이 차단되고 위기 요인도 사그라든다고 분석한다.

마케팅 전문가인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는 “기업 위기는 법정을 가기 전에 법정 밖의 법정에서 재판을 받는다”며 “기업 위기 해결의 역사는 ‘솔직할 때 가장 결과가 좋았다’는 ‘투명성의 역설’이 존재한다”고 설명했다.

그는 이어 “제품의 문제가 정서의 문제로 비화하지 않도록 조치한 위기관리 사례들에는 ‘최고 책임자가 빠르게 나섰다’는 공통점이 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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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서는 ‘채선당 직원, 임신부 폭행 사건’이 위기 극복 우수사례로 꼽힌다. 채선당 측은 진상조사 결과가 나오기 전에 신속히 사과부터 했다. 홈페이지를 통해 피해자에게 사과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를 실시간 업데이트하면서 상황을 공유했다. 사과문에 추가 불만사항을 얘기해 달라며 최고경영자(CEO) 휴대전화번호까지 공개했다. 분노가 가라앉는 와중에 채선당 측에 잘못이 없다는 진상조사 결과가 나오면서 ‘고객 우선 기업’이라는 이미지가 강해졌다.

2014년 경주 마우나오션리조트 참사 때 곧바로 현장을 찾아 사과하고 수습 과정을 지휘한 코오롱 이웅열 회장, 중동호흡기증후군(MERS·메르스) 확산 때 “환자 가족의 심정을 저도 잘 안다”며 신속히 사과하고 삼성서울병원 혁신 방안을 내놓은 삼성 이재용 부회장 등도 위기를 슬기롭게 대처한 사례로 꼽힌다.

옥시 사건을 ‘위기 감지 시스템’ 고도화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지적도 나온다. 소비자 불만 파악은 단순히 문제 해결을 위해 존재하는 게 아니라 향후 크게 비화할 문제를 미리 감지하는 차원에서 중요하다는 얘기다. 문제를 조기에 확인하고 원료를 바꾸거나 회수하는 등 조치를 취하려면 감지 시스템을 선진화하고 민감화해야만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업 컨설팅 업체인 휴먼솔루션그룹의 최철규 대표는 “과거엔 기업의 이미지가 제품과 서비스의 품질에 의해 좌우됐지만 고도 소비사회로 갈수록 경영자의 스타일과 리더십, 조직문화, 도덕성 같은 무형의 가치에 영향을 받는다”며 “기업의 바른 행동과 윤리경영도 일종의 투자인 시대가 됐다”고 말했다.

박태희 기자 adonis55@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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