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방신학에 이론있다.

중앙일보

입력

지면보기

종합 09면

오늘의 사상에서 가장 주목할 움직임이 무엇인가 묻는다면 나는 해방신학을 꼽겠다. 「보프」신부의 교황청소환으로 미국에서도 널리 관심을 일으킨 해방신학이 과연 기독교의 가면을 쓴 마르크스주의냐 아니냐로 논쟁을 하고있는데 이것은 도대체 유치한 얘기다.
마르크스주의의 혁명적 정열은 유대교와 기독교의 메시아 사상에 원래 그 젖줄을 대고 있고 오늘의 기독교가 인간해방을 역사의 현장에서 실현하고자 할 때 마르크스주의의 이론적 성과를 수렴하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르크스주의가 복음의 정치화·혁명화의 모티브를 지니고 있다면 해방신학은 혁명의 복음화를 주장하는 사상이라고 볼 수 있다.
해방신학은 그 내용의 깊이, 표현의 아름다움과 이론전개방법의 세련됨에 있어 이미 일시적 유행의 과격사상으로서 볼 수 없는 높은 수준으로 발전되어 있으며 이를 섣불리 누르려하면 오히려 교황청이 스스로 권위를 실추시킬 가능성조차 있다고 본다. 교황청이 이를 이단으로 몰아붙이지 못하고 거북한 침묵으로 시간을 끌고있는 사정을 짐작할만하다.
쿠바혁명의 엄청난 충격, 「카미요·토레스」와 「체·게바라」의 영향으로 라틴 아메리카의 교회는 보수반동의 전통에서 벗어나 급속도로 진보혁신의 길로 전환, 68년 메델린주교회의에서 인간해방을 새로운 신학운동의 최고 원리로 채택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에 처음으로 날카로운 사상적 표현을 준 것은 「헤겔」「마르크스」「그람시」등을 깊이 연구한 페루의 신학자 「구스타보·구티에레즈」(Gustavo Gutierrez)다.
이미 고전의 위치를 굳힌 그의 「해방의 신학」에서 「구티에레즈」는 사회체제의 개혁을 통한 인간소외의 극복을 역설하고 외세의 압제와 착취, 계급투쟁을 종식시키기 위하여 사회주의적 해결을 주장한다.
계급사회와 그 확대판인 국제사회, 즉 지배민족과 피지배·피착취 민족의 계급사회인 국제정치의 세계는 폭력에 의하여 유지되는 불의의 체제이므로 이를 폭력혁명을 통하여 쓰러뜨리는 것이야말로 기독교인이 수행해야할 참사랑의 길이요, 나아가 복음의 참뜻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물론 강한 반논이 일어난다. 「구티에레즈」는 폭력혁명을 주장함으로써 신학을 정치적 이데올로기로 끌어내렸을 뿐 아니라 사회주의에 종교적 의미를 부여함으로써 정치적폭력과 종교적 권위를 하나로 뭉쳐주는 큰 과오를 범하고 있다는 비난이다.
「구티에레즈」는 이 비난을 일축, 해방신학은 결코 혁명의 이데올로기가 아니라고 반박한다. 거의 모든 해방신학자들이 현존하는 사회주의를 너무도 억압적이라 하여 이를 비판하고 배척하는 것은 사실이다.
「구티에레즈」에게 있어 사회주의혁명은 참다운 「기독교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에 지나지 않는다고 그는 역설한다. 그의 신학은 인간의 근본원리에 대한 비판적 성찰과 반성이므로 억압적인 기존사회와 교회질서의 정당화·합리화에 골몰하는 이데올로기와는 정반대의 목표를 향해 간다고 주장한다. 혁명적 실천에 입각한 그의 신학은 하느님말씀의 깊은 뜻을 역사적 사건에서 밝힘으로써 예언자의 일을 해낸다고 한다.
한마디로 그의 신학은 물신화의 부정, 비판적 성찰, 혁명적 행동을 「그리스도」의 초월적진리의 빛속에서 수행함으로써 역사속에서 역사하시는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새로운 기독인의 탄생을 이루는 길을 밝힘을 목표로 하고있다. 「구티에레즈」는 과연 사상적 깊이와 박력있는 개성, 종교적 인스피레이션을 함께 갖춘 해방신학 대표선수의 모습을 그의 저서에 약여하게 보여준다.
사회개혁의 의지와 저항정신이 남달리 강한 우리의 젊은이들이 해방신학에서 받을 감명을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그러나 「구티에레즈」를 비롯한 해방신학자들에게 응분의 존경을 인색하지 않게 표하고 나서 혁명의 복음화라는 해방신학의 원리에 대하여 몇 개의 근본적인 문제를 제기하지 않을 수 없다.
나의 회의는 말할 것도 없이 필자가 역사에 있어서 「그리스도」의 역사하심을 전혀 믿지않을 뿐 아니라 나아가서 어떠한 종류의 종교적 신앙심도 전혀 가지고 있지 않은 철저한 무신논자라는 사실에 1차적으로 연유하는 것이다.
「구티에레즈」의 사상을 현실정치의 차원에서 볼 때 어떠한 어려움이 있는가. 「기독교공동체」란 도대체 무엇이며 폭력적 사회주의혁명이 종교적인 맥락에서 어떠한 위험을 안고 있는가.
로마제국의 대도시 빈민굴에서 뿌리를 내렸던 최초의 기독교공동체가 형제의 사랑으로서 룸펜프롤레타리아에게 크나 큰 정신적 위안을 주고 나아가서 사회전체에 도덕적 재생의 힘을 주었던 것은 사실이다. 「구티에레즈」는 현대산업사회의 인간소외도 같은 방법으로 해결되어야 한다고 믿는 듯하다. 그러나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로서 수립 되었을 때 사정이 어떻게 바뀌었던가. 권력을 쥔 기독교도들은 이전의 이교도들에 비할수 없이 더 잔인하고 협양하며 억압적인 세력으로 탈바꿈했던 것이다.
「기독교공동체」는 권력에 항거하여 힘없고 가난한 형제를 위하여 싸우는 동안만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다가 그 자체가 승리하여 정치권력을 잡는 순간 대번문관으로 표변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 『모든 권력은 부패하게 마련이며, 절대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한다』는 「액튼」경의 말은 무엇보다도 「기독교공동체」에 적용되는 진리라고 나는 믿고있다.
「구티에레즈」가 들으면 대노하겠지만 「기독교공동체」도 참된 기독교인도 정치적으로 실패하는 동안만 해방신학이 사상운동으로서 성공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억압과 착취가 폭력정치로 치닫게 되면 폭력혁명의 객관적 조건을 조성하는 것은 도덕의 차원 이전의 작용과 반작용의 물리법칙의 보편성을 가지고 있음은 자명한 이치다.
그러나 폭력혁명이 유일한 해결책으로 남는 극한상황에서 형제의 사랑, 「그리스도」의 사랑은 도덕적으로 지극히 위험한 함정이다. 「구티에레즈」는 『원수를 사랑하라』는 주님의 말씀을 해석하여 이것은 원수와 싸워 이를 쳐부수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원수와 싸우되 이를 사랑에서 제외하지 말라는 뜻이라고 한다. 이것은 도대체 무슨 얘기인가? 「하이네」의 말대로 원수를 사랑하되 먼저 이를 처형하고 나서 사랑하라는 뜻은 아닐테고 뜨거운 사탕을 가슴에 품고 눈물을 흘리며 원수를 죽여야 한다는 뜻일까?
싸움터에서 죽이고 죽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패배하여 항복한 적을 관대한 인도적지애로써 포용하는 것은 모든 문명인의 공통된 덕목이며 이슬람정복의 큰 성공은 피정복자에 대한 의롭고 관대한 처우에 그 비밀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공적을 하느님에게 죄지은 자로 하고나서 이를 용서하고 「그리스도」의 사람으로 이를 교화시킨다는 것은 위선의 극치라고 할 것이다.
해방신학이 참된 자기비판과 성찰이기 위해서는 우선「그리스도」의 사랑의 독점의 망상에서 스스로 해방시켜야 할 것이다. 「그리스도」가 특히 가난한 자를 사랑했다고 해서 가난한 자를 위한 혁명이 주님의 사랑으로 넘칠 수 있다고 믿는다면 이것은 매우 수상한 일이다.
「구티에레즈」는 이 문제를 자각하고 있다. 그는 정치적 해방은 종교적 메시아 주의와는 달리 그 자체의 법칙과 자율성을 가지고 있으며 구체적인 사회분석을 필요로 하고 제한된 선택의 진폭을 가진다고 한다. 옳은 말이다. 그렇다면 교회가 혁명의 투쟁에 뛰어들어야 한다는 그의 주장도 역사적으로 규정된 선택의 진폭속에서 비판적으로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교회가 혁명에 뛰어드는 것 못지 않게 중대한 것은 어느 단계에서 교회가 세속권력에서 뛰쳐나와 비판적인 거리를 다시 취하는가 하는 문제다. 해방신학자들이 개인적으로 이 문제를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가 하는 것과 관계없이 이것은 현실적으로 극히 어려운 문제다.
혁명의 복음화는 혁명의 자기비판대신 권력의 절대화·물신화로 치달을 위험을 항상 안고 있으며 해방신학자들은 기독교의 정신적 헤게모니와 자신들의 유기적 지성으로서의 영도력을 과신하고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해방신학을 살아서 움직이는 유일한 사상으로서 평가하는 동시에 깊은 의구심을 가지고 지켜보는 소이다.
필자의 무지와 편견에 대한 독자의 비판을 듣고싶다.

ADVERTISEMENT
ADVERTISEMEN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