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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취재일기

말로만 ‘법제 미비’를 때우려는 환경부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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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9면

성시윤
성시윤 기자 중앙일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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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시윤
사회부문 기자

“별로 기대 안 했어요. 이제는 더 이상 기대 안 해요.”

가습기 살균제 사건 유족 안성우(40)씨는 지난 11일 국회 환경노동위원회를 지켜본 직후 이렇게 말했다. 그는 5년 전 임신 7개월의 아내를 잃었다. 배 속 아기라도 살려 보겠다고 부부는 강제 출산을 했으나 아기 역시 하늘나라로 갔다. 그는 이날 윤성규 환경부 장관의 답변을 현장에서 5시간여 지켜봤다. 윤 장관이 이날 주로 쓴 표현은 ‘법제 미비’였다. 제품 출시 당시 가습기 살균제는 산업통상자원부 소관이었고, 기업이 허가받은 용도 이외로 화학물질을 썼더라도 환경부가 취할 조치가 없었다는 게 윤 장관 논리였다.

“환경부 자세가 이전과 달라졌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안씨는 “법제 미비는 곧 관리 부재였다는 얘기인데 정부가 보완하겠다는 의지가 안 보여 절망스럽다”고 말했다. 환경부가 지금이라도 유사 사고 재발을 막기 위해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그렇지 못하다는 이야기다. 기자 역시 환경부의 유해 화학물질 관리를 지켜보며 안씨와 같은 결론을 얻었다. 정부는 화학물질별로 인체에 위해성이 큰 용도에는 사용을 금지하는 정책을 펴고 있다. 정부가 특정 용도로의 사용을 금지한 화학물질은 모두 12종. 이마저도 2008년까지만 지정이 이뤄졌을 뿐이다. 8년 동안 추가 지정은 없었다. 이렇다 보니 유럽연합(EU)·미국·일본 등에선 오래전 금지됐던 용도가 국내에선 허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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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박용석 기자]

여기에 해당하는 대표적 사례가 페인트 원료로 들어가는 카드뮴·납·크로뮴6가화합물(일명 ‘6가크롬’)이다. 정부는 이들 물질을 내년부턴 페인트 원료로 사용하는 것을 금지하기로 방침을 정했다. 이르면 이번 상반기에 관련 규정을 개정할 예정이다. 그렇다면 정부는 지금이라도 이를 국민에게 알리고 해당 물질이 함유된 페인트를 보유 중인 국민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안내해야 한다. 하지만 환경부는 관련 규정이 개정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이런 노력을 하지 않고 있다. 페인트 업계와 이미 지난 1월 업무협약을 맺어 관련 물질 사용을 줄이도록 조치한 것과는 매우 상반된 모습이다. 업계만 정부 방침을 알 뿐 해당 제품으로 인한 위해에 노출된 국민은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다.

정부가 올해 사용 금지 용도를 확대하기로 한 노닐페놀도 마찬가지다. 내분비계 장애물질로 유럽에선 화장품 등 폭넓은 용도에서 사용을 금지하고 있다. 환경부는 위해성 평가를 마치고도 자칫 용도 제한 확대에 지장을 줄 수 있다는 이유로 공개를 꺼리고 있다. 위해성이 이미 확인된 물질에 대해서도 ‘깜깜이 정책’으로 일관하는 셈이다. 도대체 환경부는 언제까지 법제 미비를 들먹이려 하나.

성시윤 사회부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