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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에서 불어올 보호무역 바람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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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6면

이상렬 기자 중앙일보 수석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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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렬
뉴욕 특파원

‘막장’으로 치닫고 있는 미국 대선에서 흥미로운 모습을 봤다. 세라 페일린 전 알래스카 주지사가 공화당 서열 1위인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다음 선거에서 낙마시키겠다고 ‘협박’하는 대목이다. 일찌감치 도널드 트럼프 지지를 선언한 페일린은 라이언 의장이 트럼프 지지를 유보한 것을 문제 삼았다. 그가 트럼프를 택한 유권자들의 뜻을 존중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유권자의 표심이 집약된 것이 시대정신이다. 그 시대정신이 대통령을 결정하고, 사회를 질적으로 바꾼다. 유감스럽게도 요즘 미국의 시대정신은 보호무역 쪽으로 쏠려 있는 것 같다. 미국의 번영을 가져왔던 자유무역은 공화당과 민주당 양쪽에서 맹공을 당하고 있다.

공화당 후보 자리를 꿰찬 트럼프의 대외경제정책은 고율 관세와 자유무역협정 반대를 양대 축으로 한다. 트럼프에 대한 유권자들의 열광에는 자유무역이 자신들의 일자리를 빼앗아 갔다는 분노가 녹아 있다.

트럼프가 선거에 지면 보호무역주의 깃발이 꺾일 것으로 보는 것은 단견이다. 민주당 후보 지명 가능성이 큰 힐러리 클린턴 전 국무장관의 경우는 자유무역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는 평을 받는다. 그러나 클린턴이 대선에서 트럼프를 꺾으려면 버니 샌더스 상원의원 지지자들을 붙잡아야 한다. 샌더스가 누군가. 수십 년째 자유무역협정 반대를 외쳐온 외골수다. 그는 “한국과의 자유무역협정은 미국 내 일자리 7만5000개를 잃어버리는 결과를 초래했다. 미국의 제조업 일자리가 쇠락하는 데 있어 나쁜 무역협정들이 중요한 요인이 됐다”(지난해 5월 허핑턴포스트 기고)고 주장한다.

트럼프의 외교정책이 ‘미국 우선주의’라면 샌더스의 경제정책은 ‘미국 일자리 우선’으로 압축된다. 미국 경제가 처한 어려움의 원인을 미국 내부가 아니라 외부에서 찾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점에서 둘의 지향점은 닮은 꼴이다. 샌더스 지지자 상당수가 대선에서 샌더스에게 투표할 수 없을 바엔 클린턴이 아니라 차라리 트럼프에게 표를 주겠다고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클린턴이 이런 샌더스 지지층을 끌어안으려면 자신의 경제정책에 보호무역 색채를 훨씬 진하게 덧칠해야 한다.

걱정스러운 것은 바로 이 대목이다. 누가 차기 미국 대통령이 되든 미국은 각종 무역장벽을 무너뜨리는 ‘자유무역의 수호자’와는 사뭇 다른 모습일 것이다. 그런 미국의 변신은 세계 경제의 항로를 크게 바꿀 것이다. 각국엔 보호무역주의 세력이 기승을 부릴 것이다.

보호무역의 필연적 결과는 무역 축소다. 지금도 세계는 무역 감소에 시달리고 있다. 세계무역기구(WTO) 통계상 지난해 세계 교역은 금액 기준으로 13% 줄었다. 우리나라 수출의 16개월 연속 마이너스 행진 배경엔 이 같은 국제 무역 급랭이 자리하고 있다.

보호무역주의의 득세는 무역 의존도가 큰 한국 경제의 숨통을 조일 것이다. 그래서 미 대선이 일으키고 있는 보호무역주의 바람이 우려스럽기만 하다. 우리 경제의 생존 전략에 대한 새로운 고민이 필요하다.

이상렬 뉴욕 특파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