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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 관전기 3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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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0면

김현기 기자 중앙일보 도쿄 총국장 兼 순회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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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1 사우스캐롤라이나주 경선 하루 전인 2월 26일. 오렌지버그의 힐러리 클린턴 유세장에서 클린턴보다 더 열광적인 박수를 받았던 연사가 한 명 있었다. 존 루이스(77) 조지아주 하원의원. 1960년대 마틴 루서 킹 목사 등과 흑인 시민인권운동을 이끈 지도자 ‘빅6’ 중 유일한 생존자다. 내리 15선을 하는 동안 득표율이 70% 밑으로 내려간 적이 딱 한 번(1994년, 69%)밖에 없다니 흑인들의 절대적 충성은 짐작할 만하다. 유세장 80% 이상을 차지한 흑인들의 루이스에 대한 열광보다 더 놀란 건 클린턴의 연설이었다. 그는 연단을 내려간 루이스에게 눈길 한 번 주지 않은 채 이렇게 외쳤다. “좀 전에 나온 사람이 여러분의 ‘챔피언’이죠. 하지만 이제 여러분은 ‘미합중국의 차기 대통령인 나’에게 더 열광해야 할 겁니다.” 순간 어색한 정적이 흘렀다.

왜 그랬을까. ‘사건’은 8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버락 오바마에게 패한 클린턴 캠프는 ‘배신자’에 대한 분노에 떨었다. 그리고 ‘살생부’를 만들었다. 거기에는 루이스의 이름도 있었다. 클린턴은 자신과 남편 빌 덕분에 풍족한 정치자금을 누리고, 훈장까지 받고, 그들이 써준 추천서 덕분에 자녀들을 명문학교에 입학시켰으면서 오바마 지지로 돌아선 이들을 용서할 수 없었다. 당장은 눈앞의 승리가 우선이라 어색한 연출을 하고 있지만 클린턴 연설 속의 ‘가시’는 날카로웠다.

#2 3개월여의 경선전을 복기해 보면 최대 승부처는 지난달 19일 뉴욕주였다. 7연패를 당하던 클린턴이 만약 뉴욕을 놓쳤더라면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갔을 것이다. 클린턴을 살린 건 흑인이었다. 개표 결과 클린턴은 뉴욕주 면적의 85.22%에선 패배했다. 하지만 흑인 등 유색인종이 대거 몰려 사는 뉴욕시 등 대도시에서 압승한 덕분에 뉴욕주를 제압했다. 빌 더블라지오 뉴욕시장과 클린턴이 뉴욕시 구석구석을 누비고 다닌 덕분이다. 그런데도 클린턴은 막판 유세에서 “더블라지오 시장이 나에 대한 지지 선언을 너무 늦게 했다”고 쓴소리를 털어놓았다. 마음의 응어리가 대단해 보였다. ‘무섭다’는 생각까지 들었다. 당시 더블라지오 시장의 ‘썩소(썩은 미소)’가 잊혀지지 않는다. ‘뒤끝 작렬’이다. 분명 화합이나 관용의 리더십은 아니다. 집념과 ‘맞짱’의 강한 리더십이다.

미국은 물론 전 세계가 ‘트럼프 후보’에 떨고 있다. 우리 정부도 트럼프 쪽에 줄을 대려 혈안이다. 하지만 오히려 우리가 지금 해야 하는 건 ‘실체 없는 트럼프’에 대한 준비보다 ‘실체 있는 클린턴’에 대한 보다 치밀한 연구 아닐까. 초보 운전자의 갈지자 운전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아는 자의 폭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회사에서, 사회에서 “아는 놈이 더 무섭다”는 진리를 느끼는 것과 다를 게 없다. 게다가 지금 클린턴은 8년 전, 그리고 국무장관 때의 모습과는 또 다르다. 나중에 ‘믿는 도끼에 발등 찍혔다”고 후회하지 않으려면 미리 발 빠르게 움직일 때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