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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중앙시평

힐러리의 첫 1년과 박 대통령의 마지막 1년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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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35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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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

2001년 3월 미국 워싱턴 백악관, 한국의 대통령이 미국 대통령을 설득할 수 있는 시간은 한 시간 남짓이었다. 이해 1월 공화당 소속의 강경파 조지 W 부시 대통령이 새로 취임하자 김대중 대통령은 자신의 대북 포용정책을 설명하고자 서둘러 워싱턴을 방문했다. 하지만 김대중-부시 정상회담은 김 대통령의 희망과는 달리 거의 재앙에 가까웠다. 부시 대통령은 회담 도중에도 김 대통령의 발언을 중간중간 끊으면서 북한 체제에 대한 불신을 드러냈다. 심지어 정상회담 직후 자신은 북한 지도자에 대해 회의적이라고 공개 발언까지 했다. 이후의 스토리는 잘 알려진 대로 이듬해인 2002년 부시 대통령은 북한을 이란·이라크와 함께 이른바 악의 축의 하나로 지목하고 거친 대결을 예고했다. 이후 거친 북·미 대립 속에서 햇볕정책은 표류하게 됐다.

10여 년 전 한·미 관계의 역사를 새삼 되돌아보는 이유는 올 11월 미국 대통령 선거 결과에 따라 새로운 한·미 지도자 조합이 등장하게 되는데, 이는 우리에게 커다란 시련일 수도 있고 역사적 기회가 될 수도 있기 때문이다. 공화당 후보를 낚아챈 트럼프 후보의 당선은 전 세계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종류의 공세적 고립주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을 의미한다. G2 국가인 중국의 무역 관행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에 대한 거침없는 비판 등은 트럼프 정부와 지구촌이 마주칠 거대한 갈등의 시작에 불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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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지만 미국 선거의 제도적 특성과 역사를 고려해보면 트럼프 정부의 출현은 거대한 리스크이기는 하지만 실제 가능성은 높지 않다. 1992년 이래 지난 여섯 번의 미국 대선에서 줄곧 공화당 후보를 지지한 공화당 텃밭은 50개 주 가운데 13개 정도에 불과하다. 이들 주의 대통령 선거인단 수를 다 합쳐도 당선에 필요한 선거인단 과반수 270명에 크게 모자라는 100여 명에 불과할 뿐이다. 한편 지난 여섯 번의 대선에서 줄곧 민주당 후보를 지지한 민주당 텃밭은 18개 주에 달하며(이들 민주당 텃밭 선거인단 수의 합은 242명), 힐러리 후보가 이들을 모두 수성할 경우에는 경합 지역 가운데 플로리다주(선거인단 29명) 한 곳에서만 승리해도 선거인단 과반수인 270명을 넘기게 된다.

우리로서는 출현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높은 힐러리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에 대한 면밀한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이와 관련해 힐러리 후보의 대북정책이 제재 중심의 강경책으로 기울 것이라는 관측이 국내외에서 제기되고 있다. 물론 나름의 근거가 있다. 예를 들자면 지난 1월 북한의 핵실험이 임박한 것으로 관측되던 당시 힐러리 후보는 북 핵실험을 강력 비난하고 북핵 위협에 맞서서 미국의 동맹국인 한국과 일본을 적극 방어하겠다는 내용의 성명을 선제적으로 내놓은 바 있다. 이 성명은 또한 추가적인 대북제재가 필요할 수 있다고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문제의 핵심은 힐러리 정부 역시 오바마 정부나 부시 정부와 마찬가지로 북핵 이슈, 한반도 이슈를 접근하는 방식은 본질적으로 자신들의 세계 대전략에서부터 출발하는 톱다운(top down) 방식이 되리라는 점이다. 다시 말해 미국의 글로벌 전략과 비전이 먼저 설정되고, 그 틀 안에서 대중국 관계를 포함한 아시아 전략이 모양을 갖추고, 북핵을 포함한 한반도 정책은 이러한 아시아 전략의 맥락 속에서 전개될 것이다.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의 부시 대통령 설득이 실패한 까닭도 바로 부시 행정부의 공세적 일방주의라는 대전략을 과소평가한 채 오직 자신의 프로젝트를 설명하는 데 몰두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맥락에서 보자면 박근혜 대통령과 외교·안보팀은 힐러리 정부가 등장할 경우의 글로벌 비전과 아시아 전략에 대한 면밀한 분석 위에서 한·미 공조를 구상해야 한다. 특히 주의할 점은 대북 강경 메시지와는 대조적으로 힐러리 후보의 글로벌 전략, 아시아 전략은 예전 빌 클린턴 정부의 자유주의적 개입주의를 상당 부분 이어받고 있다는 점이다. 힐러리 후보의 지난 수년간의 연설문, 언론 인터뷰 등을 두루 종합해보면 핵심 요지는 “21세기의 역사는 아시아 지역에서 만들어가게 될 것이다” “아시아 지역 질서는 다자적 질서와 제도에 기반해(multilateral, rule-based) 구축돼야 하고 미국은 이에 적극적으로 관여해 나갈 것이다”로 요약된다. 달리 말해 힐러리 후보의 대북제재에 대한 태도는 굳건하지만 톱다운의 관점에서 보면 다자대화와 다자적 질서를 적극적으로 모색할 가능성도 높다. 국지적으로는 대북제재가 중심이지만 큰 그림 속에서는 다자적 질서를 향한 모색이 정책 기조가 될 수도 있다. 우리로서는 2001년 김대중 대통령이 겪었던 경험의 교훈을 냉정하게 돌아봐야 할 시점이 바로 지금이다.

장훈 중앙대 교수·정치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