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삶의 향기

신경외과 의사의 어버이날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0면

기사 이미지

김동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신경외과학

무명 가수가 부른 ‘백세인생’이라는 노래가 크게 유행했다. 아닌 게 아니라 우리나라는 급속하게 고령화 사회가 진행되고 있다. 현재 평균 수명이 남자 78세, 여자 85세다. 오래 살게 됐으니 좋은 일이지만 동반되는 여러 가지 문제점도 무시할 수 없다. 어르신들은 경제적으로 어렵고 몸도 여기저기 안 아픈 곳이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힘든 것은 무관심과 외로움이다. 개인도 사회도 건강하고 행복한 백세인생이어야 의미가 있다.

어머니 향한 딸의 세심한 관심에 양성 수막종 제거 수술
노인 치매라 보고 방치했으면 요양병원에서 숨졌을 것

깔끔한 차림의 70대 중반 할머니가 따님의 손에 이끌려 병원을 찾았다. 다급하게 보이는 따님과 달리 할머니의 표정은 덤덤했다. 자리를 권하자 따님이 사연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남편을 여의고 혼자 지내시는 어머니 댁에 들렀다. 아파트 문을 열자 타는 냄새가 코를 찔렀다. 황급히 뛰어 들어가니 어머니는 태연히 TV 시청 중이었다. 급히 부엌으로 가서 가스 불을 끄고 다그쳐 물었다. “엄마, 냄새 안 나?” 어머니는 왜 호들갑을 떠느냐는 얼굴로 “아참, 찌개 불 안 껐나?” 찌개가 다 졸아 연기까지 나는데 이렇게 무심할 수 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니 얼마 전부터 어머니의 행동이 이상했다. 항상 단정하던 몸가짐이 최근에 다소 흐트러졌다. 엄격하던 성격이 누그러져 웃음이 헤퍼졌다. 총명하시던 분이었는데 기억력도 많이 나빠졌다. 남의 일로만 생각했던 치매가 이런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겁이 덜컥 났다.

자세히 여쭤 보니 언제부터인가 기분 나쁘게 머리가 아프다고 했다. 신경학적 진찰을 했으나 이상소견은 뚜렷하지 않았다. 다만 후각신경 기능 소실로 냄새를 전혀 맡지 못했다. 짐작 가는 것이 있어 자기공명영상촬영(MRI)을 권했다.

며칠 후 결과 확인을 위해 다시 환자와 마주 앉았다. 초조한 따님은 안절부절못했다. 예상했던 대로 커다란 종양이 양쪽 전두엽 가운데 있었다. 뇌의 전두엽은 판단과 행동을 지배하는 부위라 할 수 있다. 기억력·주의력 등은 물론 인격을 만들고 도덕심을 갖게 한다. 사람은 성장하면서 예의를 갖출 줄 알고 주어진 상황에 알맞게 대응한다. 더워도 옷을 갖춰 입고 화가 나도 말을 순화해 한다. 모두 전두엽 덕분이다.

양쪽 전두엽에 문제가 생기면 성격장애가 발생한다. 상황에 부적절하게 반응하고 툭하면 싸움을 한다. 막말을 하고 성적 관심을 공개된 장소에서 부끄럼 없이 표현하기도 한다. 타이르고 이해시키려 해도 소용없다. 구조적으로 통제 능력을 잃었기 때문이다. 술에 취해 주정을 부리는 것도 전두엽의 통제 기능 상실에서 기인한다. 더불어 할머니는 전두엽 바닥의 후각신경이 종양에 눌려 냄새를 맡지 못한 것이다.

언뜻 보면 치매와 비슷하다. 하지만 전두엽 증상과 함께 후각장애를 보이면 반드시 후각신경구 수막종을 의심해야 한다. 수술로 치료 가능한 병을 자칫하면 치매로 오진해 요양병원에서 생을 마감할 수 있다.

쉽지 않은 뇌수술이었지만 종양을 성공적으로 제거했다. 수술 후 거짓말같이 할머니는 모든 것이 정상으로 돌아갔다. 다만 손상된 후각신경은 회복하지 못했다. 다행히 조직검사에서도 양성 수막종으로 진단됐다. 일주일 만에 할머니는 건강하게 퇴원할 수 있게 됐다. 자식들이 자주 찾아 뵙고 어머니에 대해 세심한 관심을 보인 덕이다. 노인이니 그렇겠지 하고 무심했다면 어떻게 됐을까. 따님과 함께 경쾌하게 걸어 나가는 모습을 보며 신경외과 의사는 뿌듯함을 느낀다.

지난달 한식을 앞둔 주말 양수리의 부모님 산소에 다녀왔다. 추운 겨울을 지냈지만 말끔한 묘소는 생전의 당신 성품인 듯했다. 상석 옆에 심어 놓은 수선화는 올해도 어김없이 노란 꽃을 피웠다. 흰 국화도 한쪽에 꽂아 드렸다. 절을 올리면서 “잘 익은 홍시를 품고 가도 반길 이 없다”는 앞선 이의 말씀이 떠올랐다. 새겨야 할 교훈을 직접 경험하고 나서야 깨닫는 어리석음이 안타까웠다.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산을 내려오면서 부질없는 생각이 들었다. 성묘 길이 아닌 부모님과 함께하는 봄나들이라면 얼마나 좋았을까. 산허리에 드문드문 피어 있는 진달래꽃이 곱다.

김동규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신경외과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