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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피니언 사설

세계 유례없는 ‘여론조사 공천’ 중단하자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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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2면

중앙선관위 산하 선거여론조사공정심의위가 작성한 4·13 총선 자료에 따르면 이번 선거에서 실시된 여론조사는 총 5374회(공개 1744회, 비공개 3630회)였고 조사회사 수는 186개였다. 186개 회사 중 자동응답(ARS) 업체가 132개였다(본지 5월 6일자). ARS 업체는 전적으로 집전화 조사밖에 하지 못하는데 그러다 보니 수도권 접전지의 경우 새누리당 지지율은 실제 선거 결과보다 평균 5%포인트 더 높게, 더불어민주당은 10~15%포인트 더 낮게 조사된 경향이 발견됐다고 한다. 이번 선거부터 휴대전화 번호를 사용할 수 있도록 안심번호제가 도입됐지만 이 제도 역시 안심한 여론조사가 되기엔 여러 한계가 있다.

여론조사의 정확성을 높이기 위한 여러 제도적 조치들을 선관위가 마련하고 선거법도 개정할 것이라고 한다. 하지만 이쯤에서 우리는 정당이 여론조사로 후보를 공천하는 비상식적인 일을 언제까지 계속할 건지 묻지 않을 수 없다. 여론조사가 예측하고 참고하는 수치가 아니라 한국의 정당처럼 판단하고 결정하는 수치로 작동하는 곳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정당의 공천을 받으려는 사람이 해당 정당의 지지자나 유권자들을 접촉해 후보자가 되는 ‘직접 호소’ 방식이 아니라 ‘전화 결정’ 방식을 택하는 나라는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이런 일이 벌어진 건 2002년 대선에서 노무현·정몽준 후보단일화 때 여론조사 방식으로 승자를 결정하는 선례를 정치권이 무분별하게 답습했기 때문이다.

여론조사는 여론일 뿐 주권자의 최종적 선택이 아니다. 정치시장의 예측이나 마케팅 기법으로 여론조사를 활용하는 것까진 어쩔 수 없지만 주권의 결정 영역에까지 여론조사가 스며든 건 민주주의의 일대 훼손이 아닐 수 없다. 정당들은 현장에 사람들을 모으고 비용이 많이 든다는 이유로 전화 경선방식을 선호해왔지만 그 결과 선거 자체를 혼란에 빠뜨려 더 많은 민주주의의 비용을 치르는 자가당착에 빠지게 되었다. 정당이 여론조사 공천을 중단해야 거기서 파생되는 정치시장에서 무분별하고 무책임한 여론조사의 혼란이 정리될 것이다. 여야 정당들이 선거가 임박하지 않은 지금 시점에서 이 문제를 논의하면 훨씬 보편적·객관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결과가 나올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