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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졸 신입행원 채용 재개 5년 그 후] “대학 간 친구는 취준생, 나는 6년차 직장인”

온라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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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권에 고졸 채용 바람이 불던 2011년 이명박 대통령이 IBK기업은행을 방문해 은행이 뽑은 20명의 고졸 특성화고 신입행원의 교육장을 방문했다.

지난 4월 7일 오후 5시 영업을 마감한 IBK기업은행 서울 신림역 지점. 전산망을 통해 본점 업무지원부로 서류를 보내는 창구 직원들의 손놀림이 분주했다. 창구 행원 중 가운데 자리에 앉은 김지혜 계장(23)은 2011년 15년 만에 부활한 고졸 채용 1기 행원이다. 5년 전 김 계장은 특성화고에 다니면서 대학 진학을 준비하다 은행에서 고졸 행원을 뽑는다는 소식을 듣고 원서를 냈다. 생각지도 않게 덜컥 합격해 어느덧 6년차 은행원이 됐다.

5년 만의 고졸 공채 부활에 떠들썩 … 정권 바뀌자 채용 주춤해져

은행에 들어와 실무적으로 큰 어려움은 없었다. 기본적인 회계나 고객 상담 기술 등은 특성화고에서 이미 배운 내용이라 오히려 능숙했다. 조직에 빨리 적응하기 위해 은행의 내규 등 그 밖의 업무는 회사의 사이버 연수원을 통해 배워나갔다. 이런 노력 덕인지 창구에서의 상품 판매 실적도 좋았다. 이를 바탕으로 은행장 표창과 격려상도 수상했다. 고졸 행원을 바라보는 주위의 시선도 달라졌다.


학력 아닌 실력으로 승부
입사 2년이 지나 2013년에는 준정규직으로의 전환에 성공했다. 자격이 생기는 올해는 정규직 전환 시험을 볼 계획이다. 2년 전부터 은행에서 학자금 지원을 받아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어 곧 대학 졸업장도 받을 예정이다. 그는 “첫 2세대 고졸 행원으로서 후배들에게 좋은 선례를 남겨주고 싶다”며 “학력이 아닌 실력으로 승부해 은행 안에서 가볼 수 있는 자리까지 가볼 생각”이라고 포부를 밝혔다.

은행권이 고졸 행원 채용을 부활시킨 지 5년이 지났다. 2011년 은행권에서 촉발된 고졸 채용 바람은 일반 기업으로도 확산됐다. 처음 시작했을 때만 해도 ‘반짝 채용’에 그칠 것이라는 지적이 많았지만 좋은 일자리를 제공해 학력·스펙 인플레의 대안을 제시했다는 평가가 적지 않다. 그렇다면 그들은 현재 어떻게 지내고 있을까. 고졸 행원을 꾸준히 채용하고 있는 은행의 고졸 행원들을 만났다.

현재 은행에 다니고 있는 고졸 행원 대부분은 대학 진학 대신 은행원의 길을 택한 것에 대해 만족한다고 답했다. 좋은 대학을 나와도 취직하기 어려운 요새 같은 때 취업 걱정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다. 김 계장은 “지금 좁은 취업문 때문에 고생하는 친구들을 보면 시간을 벌었다는 기분이 든다”며 “대학에 갔던 친구들이 지금 한창 취업을 준비하는 때라 특히 그런 안도감을 더 많이 느낀다”고 말했다. 또래에 비해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것도 좋은 점이다. 얼마 전 부모님께 아파트 살 돈을 보태 드렸다는 KB국민은행 압구정지점의 고졸 행원 황인주(23) 주임은 “대학에 진학해 돈을 쓰면서 시간을 보낸 친구들과 달리 나가야 할 돈도 아끼고 동시에 돈도 벌었으니 이중으로 이득이 된 것 같다”고 설명했다.

고졸 행원들은 대졸 행원에 비해 업무적인 측면에서 크게 부족한 점이 없다고 자부했다. 기본적인 회계나 엑셀 활용, 고객 상담 기술 같은 실무는 특성화고에서 오히려 더 자세히 배우기 때문이다. IT 관련 업무에서도 경쟁력을 갖고 있다는 평가다. 김 계장은 “점점 인터넷 뱅킹이나 모바일 뱅킹 등 전자금융 비중이 커지고 있는데 아무래도 고졸 행원이 IT에 대한 이해나 습득이 빠르고 고객에게 설명도 잘 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최병수 IBK기업은행 신림역지점장은 “처음에는 고졸 행원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직접 보니 생각보다 업무 능력에서 나무랄 데가 없다”며 “고졸 행원 특유의 활기참이 지점 전체에 활력이 되기도 한다”고 평가했다.

다만, 고졸 행원들은 전문 지식의 깊이에서는 자신들이 대졸 행원과 다소 차이가 난다고 고백했다. 특성화고에서는 실무 위주로 배우다 보니 이론이 부족한 경향이 있다는 것이다. 외국인 손님 대응도 고졸 행원들이 어려움을 느끼는 영역 중 하나다. 최근 입사하는 일반 행원들은 대학 시절 어학연수 등을 통해 기본적인 회화 능력을 갖췄지만, 특성화고에서 배우는 영어로는 업무적인 회화를 하는데 부족함이 있다는 지적이다.

이런 점을 보완하기 위해 고졸 행원 대다수는 별도로 야간대학을 다니고 있다. 지방 지점의 고졸 행원 중에서는 공부하려고 서울 지점으로 전입신청 하는 경우도 많다. 천안 지점에 있다가 서울로 올라온 황 주임도 올해부터 숭실대 금융경제학과에 다닌다. 그는 “은행에서 직접 눈으로 봐온 일에 대한 것을 배우다 보니 다른 학생들에 비해 이해도 빠르고, 반대로 학교에서 배운 걸 고객 상담 때 활용할 수 있어 좋다”고 말했다.

2012년 입사한 신한은행 중화역지점의 최주희(22) 주임은 야간대학으로 경희대 국제통상금융투자학과에 진학했다. 그는 “일단 지금은 창구에서 일하고 있지만, 미래가 어떻게 될지 모르니 미리 문을 최대한 열어놓고 준비하려고 한다”며 “조금 힘들긴 하지만, 일을 하면서 공부도 같이 할 수 있다는 게 고졸 행원의 장점 중 하나”라고 이점을 소개했다. 행원들은 은행으로부터 학자금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은행에 따라 40%부터 많게는 학자금 전액을 지원한다. 대학에 진학하지 않고 취업한 고졸 행원 입장에서는 대학 졸업장을 위한 시간과 비용 모두를 아낄 수 있는 셈이다. 주위 동료들도 고졸 행원의 대학 공부를 많이 배려해 주는 분위기다.


창구 텔러로만 일하고 처우도 열악한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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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고졸 행원의 업무 환경이나 처우에 대해 아쉽다는 목소리도 나온다. 현재 은행들은 고졸 행원을 준정규직이나 별도의 직급으로 채용한다. 기본급이나 직원 복지가 일반 행원에 비해서는 열악하다. 일정 기간이 지나면 정규직 또는 직급 전환 자격이 주어지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기본급 차이가 좁혀지지 않기도 한다. 업무 다양성에 대한 요구도 있다. 최 주임은 “아직 고졸 행원은 업무가 창구 텔러로만 제한된 경향이 있다”며 “능력에 따라서 조금 더 넓은 범위의 업무 경험을 쌓을 수 있는 기회가 마련됐으면 한다”고 털어놨다.

이들은 은행이 고졸 행원을 더 많이 뽑기를 바란다. 김 계장은 “모교(특성화고)에 멘토로 가곤 하는데 요즘 특성화고도 취업이 어렵다는 얘기가 많이 들린다”며 “고교 시절부터 전문성을 닦은 능력 있는 친구도 많으니까 고졸 출신에게도 조금 더 설 자리가 많이 생겼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황 주임은 “일반 행원들은 같이 모여 서로 배우는 게 많은 것 같은데 고졸 행원은 수도 많지 않은 데다가 여러 지방 지점에 흩어져 있어 모이기가 쉽지 않다”며 “서로 고민도 얘기하고 노하우도 교류할 수 있는 고졸 행원이 더 늘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1980년대만 해도 은행권에서 신입 은행원의 절반 정도는 상업계 고등학교 출신이었다. 특히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명문 여상 출신이 넘쳐났다. 대졸 출신보다 상대적으로 고객에게 친절하고, 고교에서 배운 금융 기본 지식을 바탕으로 업무처리를 꼼꼼히 했기 때문이다. 각 은행에서는 심성이 곱고 일을 잘하는 여상 출신을 텔러로 ‘모셔오기’ 위해 명문 여상의 문을 뻔질나게 드나들면서 교장과 담임교사를 상전 모시듯이 했다. 이들의 허락을 얻어 졸업도 하기 전에 우수인재를 ‘입도선매’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전국의 명문 여상은 중학 성적이 반에서 3등 안에 들어야 원서를 낼 정도로 수재가 몰렸다.

그러나 고졸 행원의 숫자는 1990년대부터 줄기 시작해 1997년 외환위기 때 완전히 꺾였다. 취업이 힘들어진 대학생들이 은행 창구 직원 공채로도 몰리면서 고졸 행원의 자리가 사라진 것이다. 학력 인플레도 주요 원인이다. 우리나라의 대학 진학률은 80%에 육박한다. 은행권 취업 시장에도 대졸자가 넘쳐나고 있다. 고졸 몫이었던 창구 텔러까지 대졸자가 차고 앉을 수밖에 없는 이유다.


정권 바뀌자 경단녀·시간제에 밀려
그렇게 15년 간 사라졌던 은행권의 고졸 행원은 2011년 기업은행이 특성화고 학생을 텔러로 채용하기로 하면서 부활했다. 학력·스펙 인플레가 극심해지면서 학벌 위주의 채용 관행을 탈피하고 능력 중심으로 채용해야 한다는 당시의 사회 분위기와도 맞닿아 있다. 이명박 전 대통령이 고졸 채용을 늘린 기업은행을 방문해 격려하는 등 정부에서도 고졸 채용에 힘을 실었다. 정부의 의지에 은행권이 적극 부응하면서 다른 시중은행들도 고졸 채용을 대폭 늘렸다. 당시 민주당 정세균 최고위원이 파격적으로 고졸 채용을 늘리기로 한 강만수 전 산은지주회장 겸 산업은행장을 ‘칭찬’하는 등 정치권에서도 여야 가리지 않고 고졸 채용을 내세웠다.

정권이 바뀌면서 고졸 채용 열기는 한풀 꺾인 분위기다. 이명박 정부 때는 고졸 채용을 주요 정책으로 내세운 덕에 금융권에서 적극적이었다. 그러나 현 정부 들어 ‘경력단절여성’ ‘시간제 일자리’ 등으로 채용 키워드가 바뀌었다. 뿌리깊은 학력 차별의 폐해와 고학력 인플레 부작용을 개선한다는 평가를 받았던 만큼 아쉬움이 많은 대목이다. 서정호 한국금융연구원 연구위원은 “고졸 채용은 은행 입장에서 다양한 업무 스펙트럼에 맞춰 인력군을 채용해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지만, 배경이나 임금체계로 인한 조직 내 직원 이질화 현상에 대한 우려가 나올 수 있다”며 “고졸 행원이 반짝 채용으로 끝나지 않고 정착하기 위해서는 노사가 함께 다양한 인력군을 받아들이는 조직 문화를 만들어야 한다”고 조언했다.

함승민 강병철 기자 sh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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