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전속에서 잠자는 법정신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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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3면

『이봐 증인, 당신 말이야 거짓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검사의 거친 다그침에 환갑을 지낸 증인은 멍하니 법정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4월25일하오5시쯤 서울지법 제1××호 법정. 증인 전모씨 (62)는 사기사건의 증인이었다. 복도에서 2시간반을 기다린후 겨우 들어갔다가 아들 또래의 검사에게 치도곤을 맞은 꼴이었다.
『내평생 재판소는 처음올시다. 아니, 증인으로 온게 무슨 죄라고 날 범인다루듯 한단말이오』 전씨는 치미는 화를참지못해 재판이 끝난후 애꿎은 기자에게 언성을 높였다.
4월23일하오5시40분 서울지법 제11×호 법정 밖에는 점퍼에 고무장화차림의 박모씨(35·서울창신동)가 점심도 굶은채 3시간째 기다리고 있었다. 채소행상인 박씨는 옆에서 장사하는 사람의리어카보관 싸움을 구경한 죄(?)로 증인으로 소환된것. 박씨는 하루 1만원벌이를 공쳤다고 입맛을 다시고 있었다.『원, 대기실이라도 만들어놓고 기다리라고 해야지...』 재판진행을 위해 「중요한 협력자」인 증인에게 불쾌감이나 부담감 거부감을 주는 이같은 사례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지난해11월 민정당사 농성사건때 연행된 대학생 2백64명은 경찰서에서 영장없이 4일간이나 구금됐었다. 지난2월 업무상 횡령혐의로 치안본부에 연행된 권모씨도 70고령인데도 27일간이나 구금됐다 풀려났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이철희 장영자부부도 검찰에 연행된지 l주일만에 구속됐으니 서민들의 불법구금 사례는 헤아릴수 없을 정도다.
검사 앞에서 포승이나 수갑을 풀지 않은채 조사받는 피의자도 적지않다. 심지어 법으로 금지되어 있는데도 포승으로 피고인을 묵은채 재판을 진행하는 경우도 이따금 눈에 띈다.
진술거부권을 고지하는 검사보다는 묵비권을 행사한다고 욱박지르는 검사를 찾는일이 훨씬 쉽다. 기소전은 물론이고 재판이 진행중인 사건인데도 직계가족외에는 접견금지시키는 일도 허다하다.
그러나 판사의 허가를 받은 합법적인 접견금지조치는 찾기가힘들다.
「확정판결전까지는 무죄추정」 이라는 법정신은 법전의갈피속에서 잠자고 있는 것인가.
1일은 「법의 날」. 『법을 지키자』는 다짐이 올해도 각계에서 새삼스럽다.
그러나 정작 아직은 법보다는 힘이 가깝게만 느껴지는 우리 현실이다.
법을 지키자고 너도나도 말로는 하면서도 내심으론 역시 힘을 법에 앞서 의식하게되는 의식의 2중구조를 우리는 언제쯤 바로잡을수 있을까.
법의 현실이 어려울수록 우리는 법에의 신념을 키워야만 할것이 아닌가.
「정의와 인권의 마지막 보루」로서 법의 정신을 수호하고자 애쓰는 많은 조야의 법조인과 시민들의 노력은 더욱 가속돼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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