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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SUNDAY 편집국장 레터] 사육사를 물어버린 호랑이

중앙선데이

입력

? VIP 독자 여러분, 중앙SUNDAY 편집국장 이정민입니다.


?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무섭지 않습니까. 총선 민심말입니다. JP(김종필 전 총리)는 이렇게 말합니다. ? "국민은 사육사가 아무리 잘해줘도 비위에 거슬리면 사육사를 물어버리는 호랑이다. 왜냐고 묻는게 바보다. 그게 국민이다. 대통령이 뭘 좀 했다고 국민이 아주 고마워할 거라고 생각하면 바보다. 정치하는 사람은 많지만 국민을 호랑이처럼 무서워하는 사람은 없다."? 기막힌 비유 아닌가요.4·13 총선에서 국민은 '사육사를 물어버리는' 무서운 호랑이로 돌변했습니다. 집권당의 오만방자함, 불통과 고집의 리더십, 반대를 위한 반대가 일상화된 제1야당의 운동권적 행태가 맹수의 성질을 돋운 겁니다.? '성난 호랑이'는 지난 30년간 견고히 유지돼왔던 정치의 프레임과 상식을 무너뜨렸습니다.'집권 보수당'으로선 역대 가장 초라한 성적표(121석), 새누리당적을 가진 대통령하에서 치러진 선거에서 원내 제1당→제2당으로 내려앉은 건 충격입니다. 하지만 이 정도에서 그쳤다면 '성난 호랑이 사건'은 일회성 충격파로 치부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선거는 또 돌아오니까요. 당장 내년에 대통령 선거, 후년엔 지방선거가 있지 않습니까. 하지만 '성난 호랑이 사건'이 결코 1회적일수 없는건, 영남기반 새누리당과 호남 기반 더 민주당이 30년간 누려온 과점(寡占) 체제가 붕괴될 조짐을 보이고 있기 때문입니다.


? 대구가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대구가 어딥니까. 새누리당, 그리고 박근혜 대통령 권력기반의 심장부 아닙니까. 더민주당 김부겸 의원(수성갑)이 새누리당 김문수 후보를 거의 더블 스코어 차이로 누르고 당선됐습니다. 무소속으로 나오긴 했지만 더민주 비례대표 출신의 홍의락 의원(북을)까지 합치면 사실상 2명의 야당 의원이 대구에서 나온 겁니다. 호남기반의 정당이 대구에서 당선된 건 유례가 없는 일이죠. 여기에 부산 5석,경남 3석까지 더하면 영남에서 도합 10석을 야당이 차지한 겁니다. 철옹성 같던 강남-분당 벨트도 무너져내렸죠. 강남을에선 치과의사 출신 변호사 전현희 후보가 당선됐고, 송파을(최명길)·송파병(남인순)도 야당 영토가 됐습니다. 성남분당갑(김병관)·성남분당을(김병욱) 두 곳 모두 더민주당이 석권했는데, 이 선거구가 생긴 15대 국회이래 처음있는 일이라는 군요.? "보금자리 주택에서 몰표가 나왔다"거나 "기권한 보수층들이 투표했다면 달라졌을 것"이라고 폄훼해버릴 일은 아닙니다. 목격담 하나 얘기할까요. 투표 이틀전인 지난 11일 대구에 가서,김부겸 후보의 유세 현장을 돌아봤더랬습니다. 트럭을 개조한 유세차량에 홀로 올라탄 김 후보가 아파트 단지와 상가가 밀집한 뒷골목을 누비고 있더군요. 햇볕에 그을린 거무스레한 얼굴,눈의 실핏줄마저 터져 추레한 모습으로 "대구를 위해 일하고 싶다"고 절규하고 있었습니다. 군중이 운집한 것도 아니고 박수가 터져나오는 것도 아닌,여느 유세현장이나 별반 다를 바 없는 모습에 내심 "그저 그렇군"하는 생각이 스치더군요. 그런데 갑자기 어디서 나타났는지 주부·할머니·상점 아저씨들이 딸기·음료수·오렌지 등을 들고 김 후보에게도 몰려드는 겁니다."몸에 좋다"며 드릅나물 봉지를 안기고 가는 주민도 있고요. 이렇게 가는 곳마다 물량 세례를 받다보니 수행 차량 뒷좌석은 온갖 과일·야채·보약들의 차지가 돼버렸더라구요. 그제서야 "부겸이가 당이 안 좋아서 그렇지 똑똑하고 인물도 좋아요. 난 새누리 지지자지만 요번엔 부겸이가 될 겁니다"라고 했던 연세 지긋한 택시 기사의 말이 떠오르더군요.?국민의당 돌풍이 일어난 호남에서도 2명의 새누리당 의원이 탄생했죠. 이정현 의원(전남 순천)과 정운천 당선자(정북 전주을)인데 이 의원은 호남 텃밭에서 재선에 성공하는 기록까지 세웠습니다. 두 사람 모두 '안락한' 지역구를 마다하고 3전4기 고군분투 끝에 당선됐는데 새누리 2석은 호남 전체 선거구(28개)중 더민주당이 얻은 의석(3곳)과 맞먹는 숫잡니다.


? 지역주의에 기반한 양당 체제는 1987년 대통령 직선제 개헌의 산물입니다. 군사독재 정권 25년동안 억눌렸던 '대통령을 내손으로 뽑고 싶다'는 욕구의 분출은 3김(김영삼·김대중·김종필)의 지역할거 정치와 결합합니다. 직선제를 얻어내는 대신 3김의 정치적 이해가 맞물린 소선거구제를 받아들이는 타협을 한 겁니다. 이른바 87년 체제의 출범이죠.? 87년 체제는 선거로 대통령이 바뀌고 야당이 집권당이 되는 정권교체를 경험할 때만 해도 그런대로 돌아갔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순기능보다 부작용이 도드라지고 적폐가 쌓여갔습니다.5년 단임 대통령의 한계는 성장· 저출산·통일같은 국가 비전과 전략 수립에 걸림돌로 작용했고,지역주의에 함몰된 정치는 양극화·청년실업·노사문제등 갈등 과제를 해결할 능력도,구조도 갖지 못하는 부작용을 낳았습니다. 정치는 충돌했고 국민은 분열됐습니다. 힘을 앞세운 권력 운용의 반작용은 반대를 위한 반대로 나타났습니다. 편가르기가 일상화되고 진영 논리가 판치는 뒤틀린 생태계에서 국민들의 삶은 피폐해져갔습니다.? '호랑이들'은 기회 있을 때마다 달라진 시대변화에 맞게 사육장 구조를 바꿔달라고 '사육사'에게 주문했습니다. 지금의 사육장은 30년전에 지어진 것이라 낡고 불편한데다 도무지 요즘 시스템과는 맞지를 않으니 안락한 삶을 살 수 없다고 말입니다. 하지만 기득권 유지에 몰두하고 All or Nothing의 권력싸움에 혈안이 돼있는 '사육사들'은 이런 요구를 허투루 여기거나 묵살했습니다.'영남당'과 '호남당'의 아성이 견고했기 때문이죠. 간혹 "호랑이들의 얘기를 들어봐야 한다"거나 "타협을 통해 문제를 풀자"고 주장하는 중도 합리론자들에겐 내부에서 돌맹이가 날아들었습니다."배신자"라거나 "정체성이 의심스럽다"는 이유로-.


? 4·13 총선에서 나타난 대구·광주의 변화는 수명을 다한 '1987년 체제'의 종언을 예고합니다. 비생산·저효율·고비용 정치 구조를 청산하고 새로운 정치 구조와 국가 경영 방식으로 확 바꾸라는 명령입니다.87년 체제를 대체할 새 체제는 헌법의 개정,선거구제도의 변경, 그리고 갈등 이슈 해결을 위한 사회적 합의 프로세스의 도입등이 포함돼야 할 것입니다.캐스팅 보트를 쥔 국민의 당의 출현으로 형성된 新 3당체제에선 누구도 독자적으론 아무 것도 할 수 없습니다. 대화하고 타협하지 않으면 한발짝도 나가지 못합니다. 그런 면에서 유권자들이 투표를 통해 정계개편에 시동을 건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 이번주 중앙SUNDAY는 87년 체제를 대체할 '2017년 체제'를 탐구하는 기획을 마련했습니다.20대 국회가 열리는 6월부터 논의를 시작한다면 대선이 있는 내년쯤 새로운 체제가 마련될 수 있다고 봤기 때문입니다. 20대 국회에 부여된 시대적 역할과 사명은 무얼까? 우리 사회 대표 지성으로 손꼽히는 분야별 원로·석학들로부터 들어봤습니다. 석학들이 내놓는 고언과 충고, 그리고 해법을 정치권은 물론 독자 여러분과 나누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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