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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55)제82화 출판의 길 40년(8)[한성도서]의 공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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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면보기

종합 07면

종로2가를 중심으로 한 서점가가 고대소설(얘기책) 위주의 대중적인 출판을 다루었다면, 견지동의 한도는 신진 엘리트적인 출판을 지향했다.
어느 서지학자는 한도의 출판사적 업적을 초기·중기·공헌기·흥성기· 반항출판기· 광복출판기 등으로 시대구분을 하고 있다.
여기서 말하는 초기란 1920년대로 이때엔 사내의 편집 실무진에 의하여 주로 서구의 문학물을 번역하여 출판했다. 오천원이 번역한 『세계문학 걸작집』이 나왔는데 [호메로스]의 『일리어드』, [복카치오]의 『데카메론』 『여정』, [괴테]의 『베르테르의 슬픔』 ,[위고]의 『몸 둘 곳 없는 사람』등 네 작가의 작품을 실었다. 서구문학을 우리말로 접할 수 있게 된 기념비적인 출판이었다. 또 편집부 편으로 『세계명부전』을 펴냈다.
여러 방면에서 공적이 두드러진 세계 여성들의 소설적 기록을 한데 모은 것이다. 그밖에 오천석 역 『그림동화』, 이상수 역 『인형의 집』, 김억 역 『나의 참회』, 그리고 편집부 편역으로 전기 총서 형식인 『하니발』(애국영웅), 『잔다르크』 (순국열사), 『크롬웰』(혁명열아), 『아인슈타인』(과학혁명) 등 12인의 전기를 출간하여 망국 한에 빠져있는 이 땅의 젊은이에게 꿈과 용기을 불어넣어 주었다.
이 무렵 창작물로는 마부가 지은 『혼』이 나왔는데 1924년 11월에 나온 재판은 압수 당하여 경무국 창고에서 썩고 만다. 이 책에서의 주인공은 기미독립운동을 잊지 못해 나라의 과거를 회고하고 현재에 대해 말한 다음 미래를 예언했다가 일제로부터 무기형을 당한다는 풍자소설이다. 마부란 필명으로 본명은 정연규다.
한도의 중기 출판은 이른바 신문학의 기수인 육당·춘원·김억 등의 저작에 손을 대고있는 것이 특징이었다.
문학류가 아닌 출판물로는 『한글 철필 자습서』(김극배 저), 『피아노 선율법』(강이영·윤성덕 편).『조선 사화집』(이은상 저),『조선 요리제법』(방신영), 『문예독본』(이광재 평), 『현대 모범서한문』(김억 저) 등을 내어 견실하게 꾸준히 팔렸다.
한도는 1933년 창립 10주년을 맞아 그 기념사업으로 『학등』이라는 월간지를 창간하는데 그후 이 잡지는 통권 23호까지 내었다. 이 10주년을 계기로『학등』애독자에 대한 사은 특판제를 실시하는 등 독자 저변확대에 힘을 쏟는다.
이리하여 1930년대 후반부터 한도는 흥성기로 접어든다. 이 무렵의 도서목록을 보면 출판도서는 17종목으로 분류되어 있고, 종수는 문예물만도 1백여 종에 이르고 있다. 분류 목록에는 인문·자연계의 기초과학과 응용서 등 영역이 폭넓게 망라되어 있다. 이 목록 제15항에는 점을 다룬 「복서」(복서)가 들어있어 흥미롭다.
1940년을 전후하여 일제는 전쟁수행을 위하여 강제 징병 징용·공출 강탈·창씨 개명 등 최후의 발악을 하면서 민족문화를 말살하러 든다. 이 같은 일제정책에 대해, 우리의 민중, 즉 독자들은 이심전심으로 저항했다. 즉 우리 말 말살정책 앞에서 우리말로 된 도서의 소중함을 깨닫게 되면서 한도의 창고 속에서 적체되어 낮잠 자던 책들이 불티나게 팔려나간 것이다. 독서를 통하여 조선 민중의 의식이 죽지 않았음을 여실히 보여준 예라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애석하다. 우리 민중의 출판사 한도는 해방 후 견지동 사옥의 소실로 종로 네거리 광교 모퉁이로 이전하였고, 이곳에서 서점만을 영업하다가 6·25의 혼돈 속에서 끝내 문을 닫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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