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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알파고를 이기고 싶은 거예요?”

중앙선데이

입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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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73호 29면

지난 3월을 가장 뜨겁게 달궜던 것은 뭐니뭐니 해도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승부였던 것 같다. 기존의 바둑 팬들은 물론이요 바둑의 ‘ㅂ’자도 모르는 나같은 사람마저, 심지어 유행이나 대세를 좇는 DNA가 남들에 비해 현저히 떨어지고 잘 모르거나 무관심한 분야에는 근처에도 가지 않는 성향에도 불구하고, 대국 중계 시각을 꼬박꼬박 챙기게 만들었으니.


우리는 무엇 때문에 이 대결에 그렇게 꽂혔던 것일까. 나뿐 아니라 모두가 같은 이유가 아니었을까? 기계와 인간의 싸움으로 인식된 이 대결에서 아직은 인간이 앞선다는 명제를 확인받기 위해. 그래서 공상과학 만화에 등장하는 기계에 지배당하는 인간이 당장 우리가 될 리는 없다는 사실을 증명받기 위해.


5전 1승 4패의 숭고한 결과로 모든 이벤트가 끝나자 우리 인간계의 불안감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피드백들이 쏟아져 나왔다. 알파고가 남긴 교훈, 알파고 쇼크, 인공지능 공포증 등등. 그 중에서도 한치 앞이 중요한 우리 모두를 위해 수년 안에 인공지능으로 대체될 직업군을 꼽아보는 앙케이트가 줄을 이었다. 가장 위태롭다고 꼽힌 직업들을 보면 내가 상상하던 것보다 훨씬 범위가 넓다. 콘크리트공, 정육원 및 도축원, 제품조립공, 청원경찰, 조세행정사무원, 물품이동장비 조작원, 환경미화원 등등. 인간의 땀 없이는 마무리 되지 않을 것 같은 이 모든 일들이 대체 가능하다고?


앙케이트는 반대로 인공지능이 아무리 판을 쳐도 결코 죽지 않을 직업도 꼽았다. 상위권을 훑어보니 화가, 사진작가, 작가, 지휘자, 작곡가, 연주가, 무용가, 성악가, 예능강사…. 몽땅 ‘예술가’다. 이 말대로라면 나와 동료들은 당분간은 꽤 안전하다는 얘긴데. 글쎄, 뭔가 찝찝하다. 정말 그런가? 내게는 어쩐지 거꾸로 보이는 조사 결과다.


다섯 차례의 대국이 이어지는 동안 내 머릿속에도 공상과학 만화가 쉴새없이 그려졌다. 인공지능과 대결하는 피아니스트. 어차피 한 치의 실수도 없게 만드는 것은 기계에겐 일도 아니니 대신 무엇을 가지고 대결을 하면 좋을까. 인간과 인공지능이 각각 연주를 하고 관객에게는 소리만을 들려준 후 더 좋아하는 연주를 꼽으라는 정도?


현재의 연주 기계들은 천편일률적인 음색과 한 치의 오차도 없는 딱딱한 타이밍 밖엔 구사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거야 개발을 덜 했기 때문이다. 아름다운 음색과 자유로운 타이밍은 연구만 한다면 사람 흉내를 못 낼 이유가 뭔가. 게다가 알파고가 보여준 무한의 데이터 수집 능력을 이용한다면 정말이지 어려울 거 하나 없어 보인다.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브 리히터의 연주 방식을 시대별로 나열하고 레퍼토리별로 분류해 기계에게 반복 학습시키면 1970년에 리히터가 구사했을 법한 스타일의 연주를 왜 못 만들겠는가. 그가 연주한 적 없는 곡마저 데이터를 이용해 만들어낼 수 있을 것 같다. ‘리히터가 생전에는 연주하지 않았지만 만약 했더라면 이렇게 했을, 라흐마니노프 피아노 협주곡 3번’ 이라는 이름으로 2030년에 출시된 음반의 몇몇 마디가 벌써 내 귓속에 그려지는 건 뭔가.


인공지능에는 비할 바 없이 단순하지만 실은 이와 비슷한 논리에 기초한 기계가 이미 있었다. 그것도 100년도 더 전에. ‘피아노롤’은 팩스와 원리가 유사한데 종이를 끼운 피아노를 피아니스트가 연주하고 이 연주의 음정과 타이밍을 종이가 그대로 받아 적은 것이다. 이 종이를 쏙 빼서 다른 피아노롤 피아노에 끼우면 기록된 연주가 건반까지 움직여가며 그대로 재생된다. 실제로 말러, 생상, 그리그, 드뷔시, 거쉬인 등이 피아노롤에 흔적을 남겼고 그 중 몇몇은 재생시킨 소리를 녹음해 음반으로 나왔다. 이게 벌써 반세기도 훨씬 넘은 기술인데 내가 리히터의 가상 음반을 상상하는 것이 과연 비약일까?


기술보다 더욱 나를 두렵게 하는 것은 현대의 연주 경향이다. 연주 중의 실수는 모두에게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것이고 틀에서 벗어난 연주는 지양해야 할 이단이 되어버린 21세기의 클래식 음악계. 솔직히 요즘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몇몇 연주자, 개성을 완전히 배제한 정석의 연주를 보여주는 그들에게 이렇게 묻고 싶다. “혹시 알파고를 이기고 싶은 거예요?”


그들이 단 하나의 실수도 없는 무결점의 연주를 해냈을 때, 피겨스케이팅 선수가 3회전 점프에 성공하고 얼음판에 우아하게 랜딩했을 때 보내는 것과 꼭 같은 환호를 보내는 관객들도 마찬가지다. 몇주 전 오랜만에 뵌 지휘자 임헌정 교수는 요즘 학생들이 한 틀에 찍어낸 풀빵 같다고 했다. 어쩜 그리 서로 다를 바가 없느냐고.


생전에 인공지능에 지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생각을 좀 바꿔야 할 것 같지 않나? 오직 나 밖에는 하지 못할 독창적인 연주, 그것도 연주할 때마다 달라 데이터가 기록을 하다하다 포기할 만큼 매순간이 살아있는 연주, 경탄이 아닌 감동을 전하는 연주를 하는 인간으로 말이다.


손열음피아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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