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DVERTISEMENT
오피니언 이달의 예술-미술

너와 나를 이어주는 끈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7면

기사 이미지

이주헌
미술평론가

근래 남북 간의 갈등과 긴장의 파고가 높아가면서 그 영향을 직접 체험하는 예술마을이 있다. 바로 경기도 파주 헤이리 예술마을이다. 밤이면 쩌렁쩌렁 울리는 북한의 대남 확성기 소리가 마을을 휘감아 거의 소음공해 수준이다. 자연과 예술이 주는 여운을 제대로 즐길 수 없다.

‘실과 빛-관계의 시작’전

헤이리 예술마을은 통일동산 안에 있다. 통일동산은 1989년 노태우 대통령이 제시한 한민족공동체 통일방안에 따라 평화시 건설 구상의 일환으로 조성된 단지다. 헤이리는 예술이 주는 조화와 감동이 한반도의 평화와 통일의 밑거름이 되리라는 믿음으로 첫 삽을 뜬 예술마을이지만 남북관계가 얼어붙은 요즘 설립 이래 가장 을씨년스러운 봄을 맞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마을 안에서는 예술의 힘으로 분단의 상처를 보듬고 소통의 희망을 북돋는 전시가 열리고 있다. 블루메 미술관에서 열리는 ‘실과 빛-관계의 시작’전(6월 19일까지)이다. 초대작가 이은숙은 지난해 광복절에 독일 베를린의 한국대사관과 북한대사관을 실로 잇는 행위예술로 관심을 모았던 설치미술가다. 당시 그가 한국대사관에서 북한대사관까지 실로 이은 거리는(건널목에서는 실을 사용할 수 없어 길바닥에 분필로 선을 그었다) 모두 3.8㎞. 그가 이 작품을 시도한 것은 한국인으로서 응당 지닌 통일의 염원 때문이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북녘에 있는 혈육을 만나고 싶다는 개인적인 소망 또한 컸기 때문이었다. 그는 한국전쟁 때 아버지가 그의 이복형제를 북에 두고 월남한 이산가족이다.

기사 이미지

이은숙의 ‘실풀이’(부분). 실패 500개를 사용했다.

‘실과 빛-관계의 시작’전에 나온 작품들 역시 그런 가족사적 아픔을 은근히 드러낸다. 형광 실을 사용하는 그에게 실은 본질적으로 모든 소중한 관계를 이어주는 끈을 의미한다. 평생 한 번 본 적이 없다 하더라도 그와 북의 혈육은 핏줄로 이어져 있다. 이런 가족의 끈은 인위적으로 끊을 수 없고 끊어서도 안 되는 소중한 것이다. 가족으로부터 시작되는 관계의 끈은 다양한 공동체와 집단·사회로 이어진다. 우리 모두는 이 보이지 않는 실에 의해 다채롭게 연결돼 있다. 때로는 이 실이 복잡하게 엉켜 우리를 괴롭힌다. 그대로 자르고 싶지만 그렇게 한다면 그건 두고두고 후회할 일이다. 어렵더라도 관계의 끈은 끈기 있게 풀어가야 한다. 수백 개의 실패로부터 풀려 나온 실이 여기저기 엉켜 있는 ‘실풀이’는 그 지혜에 대한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해준다.

투명한 폴리에스테르 의자 600개를 쌓아 커다란 문의 형태로 제작한 ‘소통의 의자’는 작은 단위가 모여 하나의 큰 구조를 이루는 조형물이다. 이 조형물에도 수많은 실이 부착돼 마치 섬세한 신경이나 혈관이 내재돼 있는 인상을 준다. ‘ㄴ ㅏ ㄴ ㅓ(나, 너)’ 역시 투명한 폴리에스테르로 만든 한글 자모 조형물 안에 관계를 상징하는 실이 물결처럼 흐르고 있다.

이은숙의 작품은 이처럼 우리가 본질적으로 ‘관계의, 관계에 의한, 관계를 위한’ 존재임을 상기시킨다. 더불어 제아무리 남북관계가 얼어붙었다 해도 남북을 잇는 가장 근원적인 끈인 핏줄의 끈은 결코 끊을 수 없고 끊으려 해서도 안 된다는 사실을 깊이 되새기게 한다.

이주헌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