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29)-제81화 30년대의 문화계(162) 시인 이상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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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7면

김유정은 폐병이 더 악화되어 정릉에 있는 절간에 들어가 누워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이상이 찾아왔다. 유정이 일어나 이상과 이야기를 주고받다가 별안간 옆에 놓인 요강에 대고 객혈을 하기 시작하더니 끝없이 피가 나오는 모양으로 기진맥진해 그만 다시 쓰러져 버렸다. 유정이 진정할 때까지 근심 어린 얼굴로 지켜보던 이상이 얼마 있다가 입을 열었는데, 뜻밖에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김형, 우리 자살합시다』
유정이 누워 곁눈질로 보니까 이상의 표정이 아주 심각하더라는 것이다. 유정은 그때 대꾸할 기운조차 없어서 그냥 누워있었는데, 이상이 돌아간 다음 이것이 마음에 걸려 이튿날 찾아온 안연남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였다. 김유정 말이 아무래도 이상이 무슨 짓을 할지 몰라 걱정이 되니 박태원이나 정인택한테 부탁해 이상의 동정을 살펴 달라고 하더라는 것이었다.
안연남이란 김유정의 휘문 동창으로 일본에서 유행하던 「사소설」을 본떠 신변소설을 많이 쓰던 작가였다. 구인회에 못 들어간 것이 큰 원한이 되어 우리들한테 자기를 안 끼워주었다고 욕실을 하고 덤비던 사람인데, 해방 후 어느 틈에 돌연히 좌익작가가 되었다. 사변 때 9·28 서울수복 직전의 어느 날 미아리 큰길로 파나마 모자에 와이셔츠바람으로 쌀 전대를 어깨에 메고 쇠꼬챙이 지팡이를 짚고 자기패들과 떨어져 터벅터벅 창동을 향해 북쪽으로 올라가는 것을 나는 미아리 언덕에서 바라보았다.
안연남이 정인택을 앞세우고 이상의 집을 찾아갔는데, 정인택도 그 며칠 전에 이상이 아르나르라는 잠자는 약을 열대여섯알이나 가지고 있는 것을 보고 질겁해 뺏은 일이 있었으므로 혹시나 그 수면약을 먹고 죽지 않았을까 하고 겁이 나더라는 것이다.
그러나 뜻밖에 이상은 명랑한 얼굴로 두 사람을 향해 걸걸 웃으면서『김유정과 이상의 찬란한 정사(정사)라! 한때는 그런 생각도 해보았지만 이제는 단념했으니 걱정들 마시오. 나는 곧 동경으로 떠납니다. 동경에 가서 일곱 가지 외국말을 배워 가지고 올 작정이오.』
『별안간에 동경은?』
처음 듣는 소리라 정인택이 놀라서 물었다.
『그전부터 별렀는데, 곧 결행할 작정이오.』
이상은 태연스럽게 대답하였다. 이리해서 이상은 1936년 11월 혼자 동경으로 향하였다. 공부 좀 더하고 오겠다는 것이었다.
그때 일본은 중일전쟁을 일으킬 준비를 하느라고 조금만 수상한 조선사람이면 무조건 구속해 감옥에 처넣는 판이었다.
이상은 복장이나 언동이 수상하고 동경에 온 목적이 분명치 않으므로 이듬해 1937년 정월 서신전경찰서에 구금되었다.
그러나 폐결핵 환자인 이상은 며칠 못 가 중환자가 되었으므로 일본경찰은 2월에 동경제국대학 부속병원으로 보석 입원시켰다.
이 소식을 듣고 동경에 있는 친구들이 모여들었지만 때는 이미 늦어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이래서 4월 17일 병원에서 영면하였는데, 28세의 젊은 나이였다.
이에 앞서 이상한테서 자살하자고 제의를 받았던 김유정은 치료비도 없고 어떻게 더 견딜 수가 없어서 정릉에 있는 절을 나와 광주에 사는 누이 집으로 내려갔다.
그러나 병은 더욱 침중해 가서 1937년3월29일 이상보다 스무날 앞서 별세하였다. 이상보다 2년 위였으므로 30세에 요절한 셈이었다.
이리하여 1930년대의 두 귀재는 가난과 폐결핵 때문에 30세를 전후하여 세상을 떠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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