잊고 있던 정치 오랜만에 보니…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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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9면

피킷과 구호·환성, 그리고 인파, 인파…실로 오랜만에 한국의 정치가 동면에서 깨어난 듯한 광경이었다. 그들이 이른바 「특공대」 라도 좋고 박수부대라도 좋다. 그들이 거기에 나온 이유가 무엇이든 아직도 정치에 대해 그만한 수의 사람들이 열정을 품고 몰려나와 있다는 게 느탓없는 충격으로 닿아오기까지 했다.
합동연설이 시작되면서 열기는 한층 고조되어갔다. 「불의를 보고 침묵하는 국민은 장래가 없다」 「군인이 전선으로 돌아가면 학생도 학원으로 돌아갈 것이다」 「부정부패공화국」 「개관정권」에 「이제 그만둬!」라는 호통까지 들렸다. 오랫동안 침묵과 관방에만 길들어 온 정신에게는 깜짝깜짝 놀랄만한 소리들이었다. 방어하는 목도 만만치는 않았다. 『우리는 51%만 요구할 뿐이다. 완전한 승리 또는 완전한 패배는 서로에게 상처만 남길 뿐이다』 라는 유연한 응수에서 『김씨(김대중)와의 친자관계 확인소송이라도 할 작정이냐?』 『박정희, 박정희 하지만 그만큼이라도 일해라!』 하는 가시 돋친 반격도 들렸다.
입후보자는 일곱이었지만 내용은 크게 공격과 방어 둘이었다. 공격에 가당한 것은 여섯이었는데 신기할이만큼 내용의 큰 줄거리는 거의 같았다.
언론통제, 학원탄압, 외채, 정치규제(해금), 서민정책부재(농민·근로자보호), 안보악용, 부정부패(장영자·정내혁사건) 등등-. 선거구호 또한 정치적 산출이라면 그러한 산출을 낳게 한 투입은 국민의 요구일 것이다. 민심의 소재를 살펴 야당 측의 입후보자들이 그런 구호를 선택했다고 보면 그것은 집권여당의 상처인 동시에 이 나라, 이사회의 상처로 여겨 크게 틀리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한가지 보기 민망한 것은 친자확인소송이란 비꼼을 당할 만큼 금명간 귀국하기로 되어있다는 정치적 거물에게 매달리는 태도였다.
물론 그분의 정치적 수난과 역경은 국민적인 동정과 지지를 받기에 족하고, 또 그러한 분의 지지를 받는다는 것은 예사 아닌 정치적 후광을 업는 셈이 된다.
그러나 종로-중구는 이 나라의 「정치1번지」라고 불릴 만큼 중요한 선거구역 이니 만큼 자신의 두발로 서서 떳떳하게 정치적 능력과 소신을 보여주어야 할 자리가 아니겠는가.
민망스럽기는 방어하는 쪽의 태도도 마찬가지였다. 물론 당의 구호나 정부의 청사진은 거기에 속한 입후보자의 정치적 견해나 공약의 중요한 근거가 된다.
하지만 그 대부분은 국민전체를 향한 일반적이고도 추상적인 설득이며, 더구나 여러 대중매체를 통해 홍보되어 정형화되어버린 것들이다. 그런데도 거기에만 의지해 재야의 집요한 파상공격을 받아넘기려 드는 것은 딱하다못해 미련스럽게까지 보였다. 바꾸어 말해 귀에 익어 뻔한 소리로 구체적이고도 신랄한 추궁을 지워버리려는 것은 어느 입후보자의 말대로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려드는」 일이나 아닐는지.
생각이 그렇게 흐르다 보니 신발이 젖도록 질척한 국민학교 교정을 발디딜틈없이 모여든 청중도 반드시 정치적 각성과 연관된 것이라 단정할 수도 없을 것 같았다.
어딘가 조직적이고 통제를 받는 듯한 특정후보의 지지관중, 연사에 대한 의도적인 모욕과 야유, 자기후보의 퇴장과 함께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사람의 물결들, 거기다가 입후보자에 대한 폭력사태까지 일어났다는 소문을 듣게되니 이 같은 과열이야말로 민중의 정치적 각성과는 무관한 새로운 형태의 정치적 동면이 시작되는 게 아닐까 하는 의심마저 들었다.
특히 그런 목적으로 동원된 군중의 구성이 나이 지긋한 실업자나 아주머니들 보다 아직 서른미만의 청년들 쪽이 많은 것은 전에 없던 우려까지 자아내게 했다. 과연 이것이 「바람」 일까. 매스컴의 호들갑이 아니라 진실로 오랫동안 얼어있는 이 땅의 정치풍토를 녹혀 줄 수 있는 바람이 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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