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세잃은 OPEC의 "석유독재" -새 유가체제 출발의 신호-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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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04면

OPEC가 결국 국제석유가의 하락추세에 무릎을 꿇고 유가인하에 합의했다.
이번 제네바 OPEC석유상회의결정의 특징은 지금까지 유지해온 공시가 체제를 폐지하고 유종간 가격기준을 따로 따로 결정했다는 점이다.
지금까지의 공시가체제는 아라비안 라이트(사우디아라비아산 경질유)를 기준으로 해서 각 유종간의 가격차를 결정해 유가를 형성해왔다. 이 체제하에서는 아라비안 라이트 공시가의 등락에 따라 모든 유종의 등락이 결정됐었다.
이번 회의가 공시가체제를 기술적으로 폐지한 것은 그동안 석유소비국들이 선호하는 유종이 값비싼 경질유에서 값싼 중질유로 바뀌어 왔기 때문이다.
정유기술의 발달로 질이 떨어지는 중질유를 가지고도 고급석유를 생산할 수 있게 되자OPEC 공시가체제는 탄력성을 잃고 말았다.
또하나 이번 OPEC의 인하결정은 지금까지 OPEC가 세계석유시장에 군림하면서 전권을 휘둘러온 판도에 변화가 생겼음을 시사해준다.
지금까지 OPEC는 유가와 산유량의 두 개의 칼을 휘두르며 국제석유시장을 주도해 왔으나 이번 OPEC회의는 순수하게 바깥으로부터의 압력에 못견디고 스스로를 국제시장추세에 적용시키지 않으면 안되었다.
지난 80년까지만 해도 OPEC의 세계시장 점유율은 65%에 달해 OPEC의 유가와 산유량 결정에 따라 국제석유 시장이 들먹거렸으나 지금은 시장점유율이 5%로 크게 떨어졌다.
또 영국·노르웨이등 비OPEC회원국들의 시장경제원칙에 맞추는 유가정책, 그리고 리비아·알제리·이란등 OPEC내 강경회원국들의 반발 등은 OPEC의 입장을 크게 약화시켰다.
결국 OPEC는 세계석유시장 장악기구로서 70년대와 같은 강력한 기능을 발휘할 수 없게 되었음을 이번 제네바회의결과가 말해주고 있다.
석유전문가들은 이번의 인하결정에도 불구하고 OPEC석유가는 앞으로 더욱 세찬 도전을 받게 될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현재 영국과 노르웨이가 석유현물시상에 내는 가격이 배럴당 25달러75센트에서 26달러에 이르기 때문에 OPEC석유가격이 이들과 경쟁하기 위해서는 배럴당 1∼2달러 더 인하되어야 경쟁력을 갖게 된다.
이같은 상황에서 현물시장에서의 거래량이 점차 증가라는 추세는 오히려 당연하다 하겠다. 현재 현물시장 거래량은 80년 이전에 세계전체거래량의 5%에 불과했던 것이 지금은 거의 50%에 달하고 있다.
OPEC가 갖고 있는 또하나의 지렛대는 산유량조절인데 이미 OPEC는 작년3월 하루생산량을 1천7백50만 배럴로 줄인데 이어 10월말에는 다시 1천6백만 배럴로 감산한 적이 있다. 그러나 이같은 결정도 시장으로부터의 압력을 견뎌내지 못하고 금년 1월에 들어와 1천4백만 배럴로까지 떨어졌다.
이같은 사실은 OPEC가 갖고있는 이니셔티브가 이제는 점차 사라지고 국제경쟁력에서 수세에 몰리고 있음을 시사해준다. <이규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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