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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도흠의 건강 비타민] 허리 아픈데 MRI는 정상…‘보이지 않는 통증’ 어쩌나

중앙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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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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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모(46·여·경기도 고양시)씨는 2년 전 진료실로 허리를 움켜쥐고 들어왔다. 앉자마자 극심한 허리 통증을 호소했다. 네댓 달 전부터 허리가 아파 병원 몇 군데를 전전했다고 한다. 박씨는 “통증이 허리에서 시작해 목으로 갔다가 이제는 어깨와 다리가 아프다. 처음에는 허리를 숙이기가 힘들더니 지금은 팔을 움직이기조차 어렵다”고 말했다. 누운 자세에서 다리를 들어 올리게 하고 여러 각도에서 다리를 움직이는 신경학적 검사에선 이상이 없었다. 자기공명영상촬영(MRI) 검사에서도 정상이었다. 박씨는 “아파 죽겠는데 왜 정상으로 나오는 거죠”라고 의아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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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척추질환을 치료하다 보면 박씨 같은 유형의 환자를 흔하게 접한다. 환자와 상담을 하다 보면 다른 데서 원인이 나온다. 박씨의 경우 고부 갈등으로 인한 극심한 스트레스가 원인이었다. 스트레스가 심해지면서 우울증으로 번졌고 이게 신체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정신적 스트레스가 통증이나 마비 등을 야기한 것인데, 이를 ‘신체화 장애’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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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씨를 설득해 정신건강의학과 진료를 받게 했다. 거기서 우울증 진단을 받았고 1년가량 의료진과 상담하고 항우울제를 복용한 덕분에 우울증이 사라졌다. 허리 통증도 말끔히 해결됐다. 지난해 세브란스 병원을 찾은 척추질환 환자 1만8443명 중 281명(1.5%)이 신체화 장애에 해당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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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통 환자 85%는 원인 찾기 힘들어
우울증 인한 마비, 근육통 등 다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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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심수휘 기자]

정신적 스트레스 외 다른 이유 때문에 허리 통증이 생기기도 한다. 박모(58·자영업·충북 제천시)씨는 가끔 허리가 아픈 것 말고는 특별한 증상이 없었다. 올 1월 갑자기 허리 통증이 심해져 누운 상태에서 돌아눕기가 힘들었다. 급기야 허리를 굽히고 걷기 힘들 정도로 통증이 심해지자 병원을 찾았다. 허리를 눌러보니 약간의 통증이 있었을 뿐 특별한 이상을 발견하지 못했다. MRI 검사에서도 정상으로 나왔다.

진찰 결과 원인이 다른 데 있었다. 일을 하면서 무거운 짐을 많이 들어 근육통이 생긴 것이었다. 박씨에게 신경차단술(통증을 일으키는 척추 신경에 국소마취제를 주입해 통증을 차단하는 기술)을 시술했고 스트레칭을 하도록 권고했다.

허리 통증을 진단할 때 환자와 상담을 하면서 어디가 어떻게 어떤 간격으로 아픈지, 얼마나 됐는지 등을 파악한다. 문진(問診)이다. 다음에 신경학적 검사를 한다. 1980~90년대에 MRI가 도입되면서 진료 형태가 달라졌다. MRI 검사에서 이상이 보이면 수술을 결정할 정도로 비중이 절대적으로 커졌다. 하지만 MRI의 편익이 커진 만큼 문제점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통증→MRI→이상 발견→수술’ 과정을 따랐는데 수술 후에도 통증이 개선되지 않는 경우가 나왔다.

또 아프다는 환자의 MRI에서 이상이 없는 것으로 나오거나 멀쩡한 사람의 척추 MRI를 찍어 보니 상당수에서 이상이 발견됐다. 세계적인 의학전문지 ‘뉴 잉글랜드 저널 오브 메디슨’ 논문에 따르면 아무 증상이 없는 사람의 척추 MRI를 찍었더니 3분의 2에서 이상이 발견됐다.

증상 없어도 MRI 찍으면 67%가 이상
디스크 돌출돼도 사람따라 통증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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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심수휘 기자]

서울 마포구 황모(46·회사원)씨는 만성 요통이 있긴 했어도 생활에 지장을 받을 정도는 아니었다. 그러다 1월 초 왼쪽 다리가 저려 병원을 찾았다. 신경학적 검사에서 이상이 있는 것 같아 MRI를 찍게 했다. 척추 추간판탈출증(디스크)이 심각했다. 튀어나온 디스크가 신경을 완전히 누르고 있어 당장 수술이 필요하다고 했다. 하지만 황씨가 별다른 통증을 호소하지 않아 다른 처치를 하지 않기로 했다. 정기 검사만 받게 했다.

요통 환자의 85%는 MRI 등 각종 검사를 해도 명확하게 원인을 찾기가 어렵다는 연구도 있다. 척추관협착증 수술을 받은 환자에게서 1년 뒤 통증·장애 등의 증세가 나타날 수 있다. 수술 전 척추관의 협착 정도(MRI로 파악)와 이런 증세는 관련이 없었다. MRI 검사 결과만 보고 수술을 결정해선 안 된다는 뜻이다. MRI는 인체 기관·조직의 변형이나 변화를 입체적으로 보여줄 뿐 통증을 측정하거나 보여주지 않는다. 디스크 돌출 정도가 같아도 어떤 사람은 무척 아프고 다른 사람은 아무렇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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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심수휘 기자]

그래서 의사의 문진이 가장 중요하고 그다음이 신경학적 검사다. MRI는 세 번째 정도의 비중만 두는 게 좋다. 그런데 환자들이 MRI를 과신하는 경향이 있다. MRI에서 이상이 보이면 무조건 수술을 해달라고 요구한다. 가벼운 차량 추돌사고로 병원을 찾은 민모(29·서울 서대문구)씨는 화가 나 있었다. 민씨는 “목이 아픈데 MRI를 안 찍고 약 먹고 지켜보자는 게 말이 되느냐”고 항의했다. 그를 설득해 3~4주를 지켜봤더니 3주 만에 통증이 사라졌다. MRI를 찍었으면 목 디스크로 진단됐을 수도 있다.

MRI는 인체 조직 변형만 보여줄 뿐
의사 문진, 신경학적 검사 더 중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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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예약 대기 증후군’이라는 말이 있다. 허리가 끊어질 듯 아파서 진료 예약을 했는데 환자가 너무 많아 두어 달 뒤 진료가 잡혔다. 그런데 진료 날짜가 되면 허리 통증이 사라진다는 뜻이다. 척추질환은 너무 적극적인 의학적 ‘개입’이 독이 될 수 있다. MRI는 뛰어난 진단장비지만 척추 분야에서 맹신은 금물이다.

윤도흠 세브란스병원장·신경외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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