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리포트] 엄마들, 학교서 내집 밥맛을

중앙일보

입력

업데이트

지면보기

종합 24면

"갈비찜 고기가 약간 팍팍해 보이는데요?"

"맛은 괜찮아요. 아이들이 좋아하는 반찬이라 양이 충분한지 봐야겠어요."

지난 2일 오전 경기도 고양시 일산의 대진고등학교 지하식당. 4명의 주부들이 곧 배식될 반찬을 앞에 놓고 '맛 토론'을 벌인다.

갈비찜의 빛깔만 보고도 간이 짠지 싱거운지, 오이 무침이 아이들의 입맛을 당길지 아닐지를 한 눈에 척 알아보는 이들은 이 학교 학부모들. 학교 급식의 맛과 위생상태 등을 점검하는 급식 암행어사들이다.

◇엄마는 급식 암행어사= 이 학교 2학년 13반 박수용군의 어머니 한선희씨는 2일 오전 10시 학교에 도착했다. 흰 모자에 흰 가운으로 갈아입은 한씨의 이날 '미션'은 급식 점검표를 따라 하나씩 체크하는 일.

계획된 식단과 메뉴가 일치하는지, 음식의 냄새는 이상하지 않은지… 혹 인공 조미료를 많이 넣지는 않는지를 지켜볼 때는 한씨가 유난히 두 눈을 부릅뜬다.

"가족의 식사를 준비하는 마음으로 급식을 챙기니 음식이 맛있고 깨끗해요." 한씨와 한 조가 되어 급식봉사를 하던 박연홍씨도 "엄마들이 나서면서부터 급식의 질이 몇 배나 좋아졌다"고 맞장구를 쳤다.

일산의 명문 사립고로 손꼽히는 대진고. 이 학교의 또 하나의 자랑인 '먹을 만한' 학교 급식은 이처럼 엄마들의 헌신적인 봉사에 의해 조리된다.

매일 오전 8시. 1학년 학부모 엄마 2명이 한 조가 되어 그날 쓰일 급식 재료를 점검한다. 야채와 고기, 후식용 과일까지, 1천5백명의 학생이 하루 두끼를 먹는 엄청난 분량의 재료를 일일이 확인한다.

한우는 2등급 이상, 닭고기는 도축증명서를 제시할 수 있는 업체의 것인지 등. 두시간을 꼬박 하고 나면 이번엔 2학년 엄마들의 차례다. 조리과정과 배식과정을 모니터하는 일이 그들의 임무.

급식에서 이물질이라도 나오면 급식업체에 확인사인을 받고 전 학년의 월 급식비 중 하루치를 빼는 '징계'까지 한다. 3학년 학부모들은 저녁식사를 책임지고 있다.

"한 학급의 엄마들이 1년에 일주일만 봉사하면 됩니다. 그러니 한반에서 10명 안팎의 엄마들이 1년에 한두번만 봉사하면 되는 셈이죠." 엄마들의 봉사 조 짜기 등을 총 관리하는 김영희씨는 "여러 사람의 작은 봉사가 이처럼 큰 일을 해낸다"고 뿌듯해했다.

◇엄마들의 급식과의 전쟁= 대진고 엄마들의 급식개선운동은 당연히 쉽지 않았다. 2001년 봄. 학부모회가 결성되면서 엄마들이 이 문제를 들고 나왔다.

위탁급식업자들의 시선이 곱지 않았고 학교도 거북스러워했다. 현재 대진고의 학교운영위원회 위원장인 박은진씨, 지난해 위원장인 김인숙씨 등이 주축이 되어 나섰다.

"전체 학부모 모임.학년모임.반 모임 등을 쉴 새 없이 했어요. 엄마들이 잘 호응해 큰 힘이 됐지요." 엄마들은 아이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였다. 응답자의 80%가 '불만'이라고 응답. 엄마들은 이 결과를 갖고 급식업자와의 협상을 시작했다.

급식과의 전쟁은 2002년 봄, 현 유춘성 교장이 부임하면서 원군을 얻었다. 유교장의 결단으로 강제급식이 희망자 자유급식으로 전환되자 학부모들이 급식불매운동을 벌였던 것.

매일 점심.저녁 도시락을 싸야 하는 번거로움에도 불구하고 전 교생의 85%가 이 운동에 동참했다. 결국 급식위탁업자는 한달 만에 손을 들었다.

"선생님들의 협조가 없었다면 현재와 같은 성과를 이끌어내지 못했을 것입니다." 3년간 이 운동을 이끌었던 박위원장이 학교급식 개선운동을 꿈꾸는 엄마들에게 주는 교훈이다.

문경란 여성전문기자 <moonk21@joongang.co.kr>
사진=최정동 기자 <choijd@joongang.co.kr>

ADVERTISEMENT
ADVERTISEMENT